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캐리 Sep 08. 2023

프라하행 티켓이 필요해요.

나의 설정값을 바꾸기 위해.

축구를 보러 갔다.

농구에 죽고 못 사는 내가 한 여름 더위를 감수하고 축구장으로 간 건, 어느새 축구팬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 덕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재밌다는데 한 번 보고 오지 뭐.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너무도 두려운 일이다. 익숙한 것, 해 봤던 것, 잘하는 것만 하고 싶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럴 땐 쫄보들에게 용기를 주는 약이나 좀 개발되었으면 싶다. 그래도 어쩌다 용기를 내서 뭔가를 해보면 대체로 재미있었다. 축구를 보는 것도, 아찔한 높이의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막상 해보면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작가지망생에게는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려는 노력이 중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 글에 이전에 없던 색다른 것들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16년, 주인공들이 현실과 웹툰, 두 개의 세계를 오간다는 기막힌 내용의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며 나는 왜 저런 파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하고 늘 생각했었다.

드라마 <W>다.

(MBC/ 극본 송재정  연출 정대윤, 박승우/ 이종석, 한효주, 김의성, 이태환, 정유진 주연)







1회의 엔딩은 언제나 중요하다. 한 회의 엔딩 장면은 다음 편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했다. 이 드라마가 그랬다. 단 1회 만에 주인공 오연주(한효주 분)가 현실 세계에서 웹툰 세계로 빨려 들어가며 시청자를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 드라마의 유행어이자 특징이라고 한다면, '맥락'과 '설정값'이라는 말이 아주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극 중 오성무(김의성 분)는 'W'라는 웹툰을 연재하는 인기 작가이고,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을 설정해 낸 장본인이자, 웹툰 세계의 창조주인 신이다.


"내가 그렸다. 내 작품이야. 그러니까 내 작품 안에서는 내가 신이지. 전부 다 내가 창조했으니까."


"너는 애초에 살인을 할 수 없는 캐릭터거든. 내가 널 정의로운 놈으로 설정했거든. 법과 양심에 따라 사는 놈으로."


"너는 아무 무기도 없는 힘없는 늙은이를 화가 난다고 쏴 죽일 수 없는 그런 놈이야. 그게 네 설정값이거든, 너는 지금 네가 네 의지로 와 있는 거 같니? 네 자유의지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강철은 성무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강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실존 인물이 되면서 자신을 둘러싼 사건의 맥락을 파헤쳐 간다.

아, 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란 말인가.


웹툰 세계가 뒤틀리기 전까지 성무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작가가 설정한 성격대로 캐릭터의 행동이 결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드라마에서처럼 진짜 나의 손을 벗어난 캐릭터가 나를 죽이러 오면 어떡하지. 왠지 그동안 내가 썼던 글들의 주인공이, 캐릭터 설정이 이게 뭐냐며 칼을 들고 쫓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싹하네...








나는 나의 설정값을 바꾸고 싶었다. 

내 성격을 처음부터 다 뜯어고쳐 세상의 크고 작은 풍파에도 '그러라 그래.' 하면서 잘 넘길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건 뭐, 엄마한테 따질 수도 없고, 아빠한테 따질 수도 없고.

여전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끝이 없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 혹은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몇 년 전 프라하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기를 쓰고 죽자 살자 해외여행을 가는 이유가 바로 한 번의 여행으로 두고두고 추억을 파먹고 살기 위함이라던데, 나도 딱 그 꼴이었다.

프라하는 내 꿈의 도시였고,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보리라 다짐했던 곳이었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의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프라하의 연인>이다.

(SBS/ 극본 김은숙 연출 신우철 김형식/ 전도연, 김주혁, 김민준, 윤세아 주연)







2005년 여름에 <내 이름은 김삼순>이 있었다면, 가을에는 <프라하의 연인>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프라하는 물론이고 체코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다. 처음 접해보는 것이 너무도 내 취향일 때, 평생의 소원으로 남는 모양이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삼순 언니보다 재희 언니에게, 그러니까 전도연이라는 배우에게 더 미쳐있었는 지도 모른다. 지금도 배우 전도연은 여러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배우지만 2005년 그때는 그야말로 그녀의 전성시대였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치고 뒤이어 <프라하의 연인>으로 그해 연기대상을 받았다. 특유의 콧소리와 애교, 그리고 눈물 연기는 중학생 소녀가 보기에도 완벽했다.

그때는 내가 그녀의 나이쯤 되면, 그 당시에는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극 중 재희의 나이는 아마 20대 후반이었겠지만, 아무튼 그 나이쯤이 되면 당연히 원할 때마다 외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녀처럼 2개 국어, 3개 국어쯤은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거라도 생각했다. ...그럴 수 있잖아. 중학생이 뭘 알아. 그래도 여행지에서 만난 절절한 사랑 같은 건 꿈꾸지 않아서 다행이다, 얘.








지금도 잠이 안 오면 그때의 사진을 보곤 한다.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해 체스키 크룸로프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까지, 약 10일간의 여행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린 환상 같다. 지금은 어릴 적 봤던 드라마만큼이나 현실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가끔 코끝이 시리기 시작할 때는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풍경이 어땠는지,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도, 내가 그 순간에 거기 있었다는 것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여행이란, 참 좋은 것이었구나. 내가 자주 하지 못해서 그렇지.


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면 나는 프라하를 생각할 것이다. 그럼 또다시 '여행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한동안은 열심히 살지도 모른다. 어차피 서른 넘어서 내 성격을 바꾸는 건 글러먹은 것 같고, 그 비슷하게라도 나에게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해 줄 어떤 것들이 늘 필요했다.








축구는 굉장히 재밌었다. 극적인 골이 터지며 내가 응원하는 팀이, 정확히 말하면 내 친구가 응원하는 팀이 라이벌 팀을 이겼다. 경기가 끝나도 팬들의 응원가는 멈추지 않았다. 이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제는 대구에서 열리는 불교문화엑스포에 사전 등록했다. 머지않은 주말에 엄마와 함께 갈 생각이었다. 물론 엄마의 스케줄은 물어보지 않았으나, 주말마다 산과 절로 떠나는 사람이니 좋아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말이라도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나의 결연한 의지였다. 이렇게 한 걸음씩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하다 보면, 내가 꿈꾸던 것처럼 꽃이 가득한 유럽의 한 카페에서 책 한 권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날도 오겠지.


드라마 <W>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만 여기 계속 소환되는 이유는,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건 이 남자가 나를 인생의 키라고 말해서였다. 그때 이미 이 만화의 여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 거다. 윤소희에서 오연주로."


내 인생의 키, 주인공 마저 바꿔버릴 내 인생의 키는, 오로지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새로운 말과 행동에 달린 것은 아닐까.










이전 02화 괜찮아 사랑이니까, 두 번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