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인생 드라마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을 때, 심심치 않게 나오는 드라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였다.
(SBS/ 극본 박혜련 연출 조수원/ 이보영, 이종석, 윤상현, 이다희, 정웅인 주연)
이 드라마 역시 첫회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고, 초반에 시청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관계 덕분에 몰입이 잘 됐고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주인공 수하(이종석 분)는 어렸을 때 겪은 사고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진짜 관심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덕분에 변호사인 혜성(이보영 분)의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다 알아버려 괴롭기도 하다.
초능력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떼거지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다. 현시점 가장 핫한 드라마인 <무빙>이다.
봉석(이정하 분)은 날 수 있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자유자재로 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몸이 뜨는 사람이다. 희수(고윤정 분)는 회복 능력이 있다. 절대 다치지 않는다. 머리가 깨지고 칼에 찔려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눈이 뒤집어질 능력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이런 초능력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할 것이다. 수하처럼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거나, 봉석이처럼 나는 것들. 어쩌면 모든 드라마는 그런 작은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도 그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매일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판타지.
하지만, 인물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순간, 작가는 너무나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진다. 인물의 특징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플롯 속에서 적절하게 능력이 결합되어야 보는 사람이 이질감 없이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상식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능력의 한계치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악역에게도 그만큼의 능력을 주어야 긴장감 있는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워 우리는 <무빙>과 같이 잘 만들어진 작품이 나왔을 때 환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린다면 어떨까?
사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야 작가가 적당히, 잘 배합해서 전개에 도움 되는 속마음들을 들리게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중후하고 젠틀해 보이는 아저씨가 사실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여대생의 팬티 색깔을 궁금해하고 있다면? 행복한 표정으로 임신 축하를 받고 있는 여자가 사실은 베이비박스가 어디 있을까 찾고 있다면? 세상 둘 도 없는 사랑꾼이 사실 개쓰레기라면? 난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어,라고 고백을 거절한 상대가 속으로는, 총에 맞지 않고서야 너랑 왜 사귀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변태적인 속마음들, 괜히 알게 되어 더욱 상처만 남기게 될 속마음들이 다 들리는 건 너무 큰 고통일 수도 있다. 모르는 게 약이요, 우리네 인생에는 대충 흐린 눈을 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야 마음 편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진짜 범인을 가려낸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속상한 일을 당했다는 걸 미리 눈치채고 위로해 준다거나. 근데 뭐, 별로 와닿지가 않네. 내 인생은 로맨스보다 장르물에 가까운가 보오.
심지어 <무빙>에서의 초능력자들은 도구로 전락한다. 북괴를 처단하고 나라의 임무를 부여받은 기계에 불과하다. 희수의 아버지 주원(류승룡 분)은 아무리 크게 다쳐도 금방 회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능력에 걸맞게 몸 쓰는 일을 하며 산다. 조폭이다. 조직의 큰 형님은 그런 주원을 조직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써먹는다. 형님 대신 칼 맞아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우리 부하들을 때려 죽이려던 놈에게 형님이 이라고 할 수 있냐 따지자, 주원의 큰 형님이 말한다.
"니는 안 아프잖아! 니는 어차피 괴물이잖아."
...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안 아프면, 다쳐도 되나요? 안 죽는다고 칼에 찔리고 차에 치여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형님. 금방 회복된다고 해서 아픔이 없는 건 아닐 거잖아요. 정말 정 떨어지는 소리 하고 앉았네.
김두식(조인성 분)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나라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용도로 소모될 뿐이다. 그러니 두식을 포함해 초능력을 가진 모든 요원들이 자식에게 그 능력이 유전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토록 기겁하며 숨기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희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괴물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능력이 괴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려면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하다.
사실 초능력을 꿈꿔왔던 사람들은 그리 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지옥철이 너무 싫어 집까지 바로 가는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싶었고,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그냥 한 번쯤 날아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난 그냥, 한 번쯤 해리포터의 투명망토를 써보고 싶었을 뿐. 우리 모두가 북괴를 처단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니까.
드라마에는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일상 힐링물과 멜로를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초능력과 같은 판타지 장르는 다소 멀게 느껴졌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 나에게 없는 것,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러니 역지사지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겠지.
스스로 꽤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누구보다도 편협한 순간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들린다면, 생각의 폭이 더 좁아질 것만 같았다. 인간이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인 건, 내 이야기를 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들어주라는 뜻이라던데, 이런 걸 보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평생 동안 서로의 마음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는, 사람이 사람을 외면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나 버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세상 모든 신들의 큰 그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