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 유럽 돌바닥에서의 기록 17

열일곱 번째 기록- 꿈에서 깰 시간, 고백홈

by 릴리코이

비행기 안. 한국까지는 3시간이 남음.

생각해보면 시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흘렀다. 지금 나는 몽골을 지나고 있다. 창문 밖에는 눈 덮인 산의 지구 표면. 비행할 때 창문 밖을 보면 정말이지 너무 신기하다. 지구가 참 동글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하늘은 참 신기하다. 아니 우주는 참 신기하다. 우주 안에 지구별이 참 신기하다. 그리고 수많은 별 중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존재하는 것도. 우리가 정의하는 ‘세상’은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구별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공상가. 이런 공상들에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야 할텐데.


이 두꺼운 노트가 빼곡히 채워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가사를 써오고 싶었지만 뭔가 부담이 되어서인지, 아님 내 머리속을 둥둥떠다니는 생각들을 아름답게 함축해서는 도저히 못쓰겠어서인지 한장도 쓰지 못했다. 대신에, 에세이 1권 나왔구나. 이 노트는 여행 내내, 구글 지도와 함께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다 들어주는 이해심이 아주 많은 친구.

저 돌바닥에 캐리어를 질질 끌고 플리마켓 가는 길

리스본에서 캐리어를 끌고 잠깐이라도 집 앞 플리마켓에 들른 것도, 꾸역꾸역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데도 동루이스 다리를 건넌 것도, 나쵸의 에어비앤비 취소로 좌절하지 않고 아주 예쁜 추억을 만들어준 카를로스 제니의 에어비앤비를 잘 찾은 것도 모두 잘했다 싶다. 참 잘했다. 참 좋았다.

비가 억수로 오는데도 포르토 골목골목을 걷고, 기분이 안 좋을 땐 집으로 들어와 하루 종일 고양이 인디와 논 것도, 몬세라트에서 유명하다던 아이들 합창을 보지 않고 넋 놓고 산 봉우리에 앉아있던 것도, 방금 맥주랑 맛있는 땅콩을 요청해 먹은 것도, 참 잘했다. 참 좋았다.


나는 글을 쓰기 전, 내가 그전에 써왔던 글들을 읽는다. 재미있다. 웃음이 쿡쿡. 그때의 내가 기억나서일까 아님 내 글이 정말로 유쾌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글을 쓰면 쓸수록 예뻐진다는 것이다.


이번 여정 동안 나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 난.. 과연 성장했을까?

초입 땐, 나를 몰아붙였다. 여행에서조차, 이 낭만적인 유럽에서조차, 나를 몰아붙이고야 말았다.

'이번 여행에서 너는 무언갈 꼭 얻어가야해.'

'너는 꼭 돌아갈 때쯤엔 어딘가 달라져있어야 돼.'

하지만 포르토에서부터 나는, 다 내려놓은 거 같다.

그저 나는 나로 살아가면 된다.

대단한 인생이란 없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을 감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얼마를 벌고, 어떤 옷을 입는 것은 중요치 않다. 그저 살아내면 된다. 이 삶을, 이 인생을!

울타리를 따라 그냥 걸으면 돼

23년을 내 안에 나로 살면서, 나는 생각보다 스스로를 잘 몰랐다. 이 여정 동안 오롯히, '나'랑만 지내는 것은 솔직히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버겁지도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용감했고, 자유로웠고,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가족들에게든, 친구들에게든, 어디서든, 가장 많이 아는 척 앞장섰던 나지만 이곳에서, 서툰 내가 참 좋았다.


나는 솔직히 이 얕고 얕은 해외 경험과 지식으로, 외국사람에 대한 편견이 아주 조금은 있었지 않나 싶다. 왠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정이 없을 것 같고,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에게 덜 사랑하는 나쁜 남자일 것 같고.. 전부 깨졌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오히려 더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그들이, 내 눈엔 우리보다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 같기도. 백발의 노인이 돼서도 길거리에서 딥키스를 하시는 노부부를 많이 보았다. ONLY LOVE.

오래된 책들이 주는 감동

지금 창문에 비치는 밝은 동그라미가 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이 선팅이 되어있어 비행기 불빛인 줄 알았는데. 계속 밤인 이유가 뭘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비행 1시간이 남은 지금에서야 알아내다니.. 나는 선팅이 싫다. 나는 자연 본연이 좋다. 맛도, 색도, 사람도, 나도. 꾸며낸, 만들어낸 내가 아닌 나 그 자체가 참 좋다.

지금은 구름 위에 앉아 있다. 몬세라트에 갔을 때도 구름보다 위에 있었는데. 할머니, 아빠, 엄마는 건강할까? 나 없이, 얼마나 엉망징창일까? ..하지만 아마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상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많은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철저히 증명하듯이.


이 여정은 어떤 의미에선 3일 같았고, 어떤 의미에선 1달 같았다. 아쉽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적당히. 아주 적정한 기간이었다. 아빠의 사고로 초겨울에 유럽을 오게 되어, 처음엔 궂은 날씨에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잘 해내었다. 잘 살아내었다.

나는 웬만하면 ‘여행’이라는 표현을 이 공간에 사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나에게 이번 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의 탈출구였고, 그저 나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 이었기에. 여행이라는 표현은 그에 반해 너무 쉽고 간편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괴로웠다. 어떠한 감정도 깊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나 자신이 차갑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죄책감까지 들었다. 가족에게 차갑고, 무엇보다, 나에게.

나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나.

이틀내내 내 동전을 다 털어드렸던, 너무 신기한 신사 아조씨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억지로 짓는 표정이 아니라 행복함에, 자연스러운 웃음과 눈물이 나던 나 스스로 가엾었다. '너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너무 이렇게 웃고 싶었구나.' 그 어떤 것에도 의지 않고 나와 함께, 나만 믿고 걷는 길들이 참으로 고단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유로움을 얻었었다. 누굴 데리고 다니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나는 아마 독신 주의자가 어울릴지도 몰라.

배려. 배려에 지쳐있었나 봐. 남들에게 맞추는 삶에 지독히도 지쳐있었나 보다. 이제 그만하자.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자. 내 제일 친한 친구는 바로 나야.

푸아그라 스테이크, 클라라맥주. 1일 1클라라 였는데. 술을 안좋아하는 나에게 인생 맥주.

세금신고서 직업 칸에 뮤지컬.. 배우..라고 적는데, 괜스레 참 부끄럽다. 풋, 니가 무슨.

24살. 이제 25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누군가는 모든 것을 이룬 나이이며, 누군가는 이제 대학에 입학하는 그런, 그런 나이.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은 사람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뮤지컬 배우로 승승장구를 한다고 해도 내가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어. 나는 나.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 나는 여태껏 성공의 기준을 남들이 봤을 때 부러워할 그 무언가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뮤지컬 오디션에 붙었을 때도, 남들 다 떨어진 '그 오디션'을 내가 붙었기에 더 기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다. 도전, 도전.

물론 무대는 놓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남들 시선에 부끄러워 도전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하나 해볼 것이다. 안돼도 어때. 아직 젊으니까!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되지. 나는 아이도, 남편도 없잖아. 물론 돈도 없지... 하지만 난 오롯이 '나'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되는 이 시기에 감사하며, 도전할 거다. 실패해도 괜찮아. 다시 새로 시작해도 괜찮아. 즐겁다. 도전할 생각에. just do it! judi do it!

봐도 또 봐도 진짜같아서 맨날 흠칫 놀라게 했던 마네킹도, 이젠 서서히 내 기억에서 잊혀지겠지

난 이곳에서 이름을 물어보면 아임 주디 라 했다. 오늘 화장품 가게 점원이 자꾸 날 따라오며 이야기를 하고 싶다기에(물론 화장품을 팔고 싶어서) 한국에선 절대 따라갈 내가 아니지만, 흔쾌히 따라갔다. 한참을 대화하다가 안 산다며 미안~하고 나오는 길에 다른 직원이 내게 니 이름 참 좋아.라고 말해준다. 이젠 진짜 닉네임이 아닌 정말로 내 이름이 된 것 같다. judi do it everything!

난 언제나 도전하며 꿈을 꾸고 살아갈 거다. 내 지금이, 내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고 싶다. 도전하고 실패하며, 성공할 것이다. 괴롭기도, 경이롭기도 할 것이며, 죽고 싶기도, 이 순간에 평생 멈춰있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 모든 삶을 사랑하겠다.
그 어떤 삶도 '내 인생'이니까.

눈앞에 한국 바다가 보인다. 아, 반갑다. 아, 기쁘다.

어라, 한국 하늘도 유럽 하늘이랑 같은 색이네.. 그렇게 유럽 하늘색은 역시 참 예쁘다고 생각했거늘. 바보.

생각하기 나름인 참~ 재미있는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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