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기고 싶은 끈
세상을 배우다 4 - 내가 만드는 인연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에 떡진 머리, 빛바랜 점퍼를 걸치고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나갔다.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라 후다닥 해치우면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집에 들어올 수도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재활용품을 서둘러 분류하고 있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쑥 들어왔다.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만났더라?’
그 여자가 나가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기 고향이 금산이에요?”
“아닌데요.”
여자는 쌀쌀맞게 돌아섰다. 무안했지만 꾀죄죄한 몰골로 불쑥 누군가 내게 물었더라도 그리 친절한 대답은 안 했으리라 위안을 삼았다.
여자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 아파트 한마당 축제에서였다.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웃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나가던 그 여자가 동생에게 인사했다.
“아는 사람이야?”
“우리 라인에 살잖아.”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데, 동향은 아니더라고. 혹시 고등학교 동창인가?”
“언니, 내가 물어볼까?”
서글서글한 동생이 다가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성여고?”
“맞아.”
여고시절 내내 우리는 같은 반을 해 본 적도, 오다가다 말 한 번 걸어 본 기억도 없는 사이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우리는 눈길만 스친 인연으로 기적처럼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어려운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친구가 왔다.
며칠 뒤 친구가 전화해서는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나의 어린 시절, 나라에서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다. 밥에는 늘 콩이나 보리가 섞여 있었고, 점심으로는 국수나 수제비를 자주 먹었다. 배가 고프니 먹은 거지 맛있어서 먹은 기억이 없다. 맛이 기가 막힌 라면이 나왔을 때도 엄마는 식구가 많으니 양을 늘리려고 국수를 넣어서 함께 끓였다. 그게 너무 싫었다. 맛있는 라면을 국수가 망친 느낌이었다.
첫 데이트, 국수든 수제비든 상관없었다. 친구는 주방까지 합쳐도 서너 평 밖에 안 돼 보이는 작은 분식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가게 한가운데 큰 테이블이 하나, 테이블 주위로 등받이도 없는 의자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 속에 꼬치 어묵이 수북했다. 손님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함께 온 사람들처럼 빙 둘러앉아 잔치국수를 먹었다. 그 풍경이 이제 막 친구가 된 우리처럼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정답기도 했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으로 추억을 만든 날부터 친구와 국수가 좋았다. 특별히 그 집 국수가 맛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낯선 이들과 함께 먹은 국수가 용기를 주었다. ‘여기서도 잘 살 수 있을 거야. 이제 친구도 생겼잖아.’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우리 집은 1층, 친구네는 같은 라인 6층이었다. 친구가 집으로 초대한 날에는 와인 한 병을 다 마실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온 얘기도 나눴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가까운 동네에서 신혼생활을 한 것도, 심지어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도 같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안타깝게 이별의 순간도 빨리 왔다. 친구 덕에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앞둔 어느 날, 친구 남편이 본사로 발령받아 서울로 떠났다. 6층으로, 1층으로 왔다갔다 하며 서로 의지가 됐는데.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따뜻한 잔치국수가 먹고 싶었다. 내가 겪은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낼 친구가 걱정되었다. 서울에서 전화한 친구는 군산을 그리워했다. 사람이 너무 많은 서울이지만 정작 아는 사람은 없다고 쓸쓸해했다.
친구와 통화를 했던 날, 서울에 사는 대학 동기, 선영이가 떠올랐다. ‘어! 둘이 같은 동네 아닌가?’ 서둘러 선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집은 나보다 한참 작지만 마음이 넓고 지혜로운 친구다. 허걱!! 선영이와 친구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 끈이 되었다. 두 사람도 바로 이름을 부르는 친구가 되었는데 좋기도 하면서 질투가 나기도 했다. 물리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는 나와 달리 둘은 시시때때로 만나 우정을 쌓았으니까.
일 년에 한두 번 우리는 서울에서 셋이 뭉친다. 연극도 보고, 맛집도 찾아가고, 전화로 못다 한 얘기를 밤늦도록 나눈다. 인연은 만드는 거다. 꾀죄죄한 몰골로 여자를 불러 세웠던 용기가,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될 뻔했는데 한 번 더 붙잡은 노력이 친구를 만들었다. 두 사람에게 괜찮은 친구를 선물한 나는 서울 나들이가 잦아졌다.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끌어당기고 싶은 끈은 당기기 마련이다.
눈길만 닿아도 인연이 될 수 있고, SNS로 문자만 주고받아도 친구가 되는 세상이다. 글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묘하게 끌려서 만난 적이 없어도 가까운 친구 같다. 때로는 한이불 덮고 사는 사람보다 더 위로가 될 때도 있더라. 많은 사람에게 끌리는 친구가 되고 싶다. 글이라는 끈으로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끌어당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