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별 Jan 15. 2024

말로 주고 되로 받는 일

실천19. 나를 회복시키는 치트키 알아두기

어제는 시어머님 생신이라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놀이시설 완비'를 자랑하는 정육식당으로 미끄럼틀, 트램펄린, 오락기까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두 아이는 고기가 익는 동안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표정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을 한다. 어떤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마구 눌러대지만 또 어찌어찌 KO승을 하기도,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다가 패배를 당하기도 한다.


아이들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쩌면 내 하루도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캐릭터는 사자후가 무기인 워킹맘이고 내 상대들은 직장업무, 집안일, 육아 등 다양하다. 직장 업무는 감정노동과 문서작업으로 내 진을 빼놓고, 식사준비와 집안일은 주말도 없이 찾아오는 패기와 부지런함으로 내 에너지를 훅훅 가져가 버린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외모에 무논리를 앞세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혼란 속에 나를 빠뜨린다. 이렇게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을 겨우 마무리 지으면, 나를 돌보고 챙길 힘도 없이 씻는 일마저도 자꾸만 뒤로 미루고 그저 누워있고만 싶다.


강아지, 고양이 하다못해 햄스터라도 키우자는 아이들의 요청을 매번 애써 못 들은 척하는 것도, 해가 지면서 함께 바닥을 보이는 비루한 내 에너지 때문이다. 아무 버튼이나 눌러서 한 번씩 이길 때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언제나 에너지가 간당간당한 상태로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여기에 돌봄이 필요한 또 다른 생명체를 더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비슷한 이유로 화분도 들이지 않았다. 혼자 살 때도 선인장을 말라죽게 했을 정도로 무언가를 '돌보고' '키우고' '가꾸는' 일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니 에너지가 남을 리 없다.)


그래도 집에 식물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말에, 6년 전 이사면서 마련 대형 스투키 화분 하나가 집안의 삭막함을 그나마 덜어주었는데, 물을 거의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2년 전 부모님이 주신 제법 큰 고무나무 화분을 고생스럽게 가져오면서도 금방 죽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사이 아이를 키우면서 내 '돌봄 스킬'이 업그레이드된 탓인지,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 탓인지 다행히 둘 다 죽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지난달에는 연수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몬스테라를 비롯해서 아글라오네마, 칼라데아 비타타 이름도 생소한 아이 데려오게 되었다.


몬스테라를 귀엽게 줄여 '몽테'라고 이름을 붙여준 화분은 집에 데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돌돌 말린 잎사귀를 피워내더니 양 옆으로 멋지게 갈라진 가장 큰 잎을 선보였다. 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 작은 잎사귀도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게 키 큰 형님 잎사귀들이 찢어진 모양이 된 것"이라고 강사선생님께 들은 내용을 아는 척하며 들려주기도 했다. 아글라오네마는 영화 레옹에 나온 것으로 유명하고, 칼라데아는 푸른 잎사귀 위에 붓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그린 듯한 줄무늬가 인상적이다.


얼마 되지 않지만 거실 한편에 초록 식물들이 자리를 잡자 말 그대로 '생기'가 느껴졌다. 자고 일어난 아이들이 화분에 인사해 주는 모습도 격하게 사랑스러워서, 그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초록이들을 잘 키우고 싶어졌다. 겉흙이 마르면 물을 주고, 부족한 겨울 햇빛을 스탠드 빛으로 채워주고, 매서운 겨울바람 대신 공기청정기 바람도 쏘여주면서 나름의 애정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분갈이가 번거로워 매번 뽑아버리던 스투키 새순도, 큰 마음먹고 화분과 배양토를 주문해서 모체와 자구를 분리하여 새로운 화분에 옮겨 심어주었다.


화분을 처음 들인 후, 너무 자주 들여다보고 물을 주어서 과습으로 죽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분당 2m도 이동하지 못하는 나무늘보와 비슷한 수준의 에너지를 가진 나는 의도치 않게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애정을 보이는 그럭저럭 괜찮은 초보 식집사일지도 모르겠. 무엇보다도 초록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소진된 에너지가 조금이나마 차오르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생각해 보니 직장일도 집안일도 하고 난 후 나름의 성취감과 보람이 있다. (비록 내 에너지를 '말'로 퍼주고 '되'로 돌려받는 손해 보는 기분이지만.) 게임 속 치트키나 마법의 물약처럼 아이들 포옹 한 번, 예쁜 말 한 번에 바닥을 보이던 에너지가 한 번에 가득 차오르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도 나는 현실판 게임에서 KO승을 할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희망은, 줄어든 P를 회복시켜 줄 소소한 아이템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을 잘 끝마친 후 찾아오는 성취감, 아이들 웃음소리가 안겨주는 행복함, 청소 후 깨끗해진 집을 보 느끼는 뿌듯함이 내 마법 물약이자 치트키이다. 이번에 '식물이 주는 편안함'을 인벤토리에 추가한 것처럼 앞으로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아이템을 확보해야겠다. 생존을 위해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