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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Sep 18. 2024

사랑의 배터리

실천27. 서로 사랑으로 채워주기

이번 여름은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만큼 마음속 우울도 짙은 색을 더해만 갔던 계절이었다. '이대로 저 가로수에 차를 박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고 출근했다가, 학생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교실 뒷벽 어딘가를 바라보며 수업을 겨우 마치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걸그룹의 리드미컬한 노래를 듣고도 자꾸만 삐져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퇴근했다. 잠을 못 자고 밤을 지새우고, 씻는 일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힘든 일이 되었다. 남편의 권유로 용기 내서 신청한 심리상담 프로그램에서 만난 교수님은 '그동안 눈 가리개한 경주마처럼 달려오다가 이제 조금 살만해진 거라고, 지금까지 눈치만 보고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 중'이라고 하셨다.


교수님과 함께 '그레이'라 이름 붙인 내 마음속의 시커먼 무언가가 커지는 게 느껴질 때면, 흡혈귀를 만났을 때 다급히 은십자가를 내미는 마음으로 상담 시간에 연습한 여러 방법(호흡, 나비포옹 등)을 시도해 보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그래도 덜 자고 덜 씻으면서라도 꾸역꾸역 출근하고, 어느 정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맑은 물에 서서히 퍼져나가는 검은 잉크처럼 내 우울함이 아이들에게 옮겨갈까 봐, 아이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교수님도 '우울과 불안 수치로만 보면 약을 먹어야 하지만, 아직 일상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상담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라고 하셨기 때문에 '괜찮아. 안 죽어'를 주문처럼 외우며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에 더욱 집중했다.


사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매일은 '우울할 틈이 어디 있어!'라고 외치는 날의 반복이라서, 나는 입맛이 없어도 아이들을 굶길 수 없기에 뭐라도 차려서 내놓게 되고, 내일 입힐 옷이 없어서 부랴부랴 빨래도 하게 되고, 학교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오늘 친구들이랑 즐거운 일이 있을 거야.', '오늘 네가 좋아하는 과목 수업이 있잖아.', '오늘 메뉴도 엄청 맛있는데?' 같은 말들로 달래 놓고 정작 내가 마음이 힘들다며 출근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현관문을 나서게 된다.




집과 학교가 그리 가깝지 않아서 아이들은 아파트 셔틀버스로 등하교를 하는데, 하루는 셔틀버스가 고장 나서 내가 출근길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게 되었다. 이틀 동안 정비를 마친 셔틀버스는 다시 정상운행을 시작했지만 두 아이는 여전히 내 차를 타고 등굣길에 오른다. 출근길과 반대 방향이지만 나도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좋아서 (키득이 투닥으로 변해서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지만) 좀 더 서둘러 나오는 쪽을 선택했다.


학교 정문을 조금 지나쳐 주정차가 가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이 내리기 전, 운전석에서 몸을 돌려 내 두 손을 뒷좌석 쪽으로 내민다. 왼손엔 어느새 내 손과 크기가 비슷해진 제법 단단한 손이, 오른손엔 아직도 젤리처럼 보들말캉한 작은 손이 맞잡힌다. "충저~~~~언! 지이이이잉!!" 효과음도 요란하게 우리는 손을 맞잡고 하루치 사랑을 서로에게 넘겨주기 바쁘다. 아이들도 나도 학교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지내고 오후에 다시 웃으며 만나기를 기원하는 작은 의식이다. 출근길이 너무 우울해서 조금이나마 힘을 내보려고 시작한 일인데, 마음이 분주하고 '그레이'가 덩치를 키우는 게 느껴질 때면 혼자 두 손을 맞잡고 조용히 '충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다.


퇴근 후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마치고, '깜깜해서 혼자는 무서워서 못 나가겠는데 밖에서 줄넘기 연습을 꼭 해야겠다'는 둘째와 나갔다 와서,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하고 싶은 일 할 시간이 없다'며 부루퉁한 첫째를 어르고 달래 가며 숙제까지 봐주고 나니 기운이 쏙 빠져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소파에 쭈그리고 있던 참이었다. 둘째 아이가 '충전하자'며 다가와 두 팔을 벌린다. 서로 꼭 안고 심장 소리를 느끼고 볼도 코도 부빈다. 온몸으로 '건드리지 마시오'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먼저 다가와 준 작은 아이의 용기가 고맙다. 아이의 보송한 뺨이 닿자마자 용비늘처럼 단단했던 마음이 병아리 솜털처럼 순해지고, 별것 아닌 일로 짜증이 올라왔던 마음이 부끄러워 얼굴도 발개진다. 아이에게 안겨 고마워, 미안해를 속죄문처럼 되뇌니 아이가 등까지 토닥여준다.

"앗, 00아! 어디서 펑 소리가 들리는데? 행복 과다 충전으로 엄마 마음이 터진 것 같은데~!!"

"엄청 성능 좋은 충전기라서 그래!"




상담을 마치며 교수님은, 나이로는 아직 중년이라 하기에 조금 이르지만 구직, 결혼, 출산 등 큼직한 생애 과업들을 완수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어 인생그래프 상에서는 '중년기'로 봐도 무방하다고, 이만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온 스스로를 좀 더 인정해 주고 추켜세워주라고 하셨다.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장 어려운 숙제이다. 내 눈에는 늘 모자라고 부족하고 충분치 못한 모습만 보이는데, 나 정도는 다들 하고 있는데 (심지어 더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이대로도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은 오소소 닭살만 불러올 뿐 고객센터 상담원의 '사랑합니다 고객님'만큼이나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이와 꼭 안고 있는 이 순간 '아니, 이렇게 성능 좋은 사랑의 배터리를 둘이나 세상에 데려오다니. 나 정말 대단한 사람 맞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이들을 챙긴다며 억지로 일어나 밥을 차리고, 출근을 했던 일들이 결국엔 나를 챙기는 일이었다. 이토록 소중한 사랑의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게 하루하루 충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가끔은 사랑이 부족하다고 응석도 부려야지. 무엇보다 나도 아이들에게 고성능 배터리가 되어줘야지. '앗, 그런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엄마랑 안는 것도, 손 잡는 것도 싫어한다던데... 그때가 되면 뭘로 충전을 해야 하려나.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은 충전일까... 앗, 교수님이 일어나지 않은 일을 당겨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이러네...'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타이밍 좋게 아이들이 엄마를 부른다. 저녁 메뉴가 뭐냐고, 학습지 수학 문제 모르겠다고, 셔틀콕은 주문했냐고, 밥 먹고 나가서 놀아도 되냐고 종알대는 두 아이의 목소리에 그레이도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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