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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Aug 19. 2023

내 남자친구는 왕순대

간 허파까지 다 줄 거지?

<섹스 앤 더 4티> 17화 


‘순대’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었다. 성은 왕, 왕순대. 운명의 사랑을 기다리지만 매번 고꾸라지는 주인공 앞에 나타난 그. 장소는 허름한 좌판 순대집. 주인공이 남자와 헤어질 때마다 순대에 소주를 마시는 곳이다. 순대 한 입에 소주 한 잔을 탁 털어 넣고 싶은데, 오늘따라 순대가 떨어진 상황. 사장님은 순대 한 줄이 사라져 급히 삶고 있다며 기다려 달라 한다. 


깡술은 너무 청승맞아 소주 한 잔을 따라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옆자리 남자가 말을 건다. “괜찮으시면 제 순대 좀 나눠드릴까요? 저 혼자 먹긴 좀 많아서요.” 뭐지 이 남자? 얼굴부터 목소리까지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순대 좋아하는 남자는 처음이라 호기심이 발동한다. 아마도 전 남자친구들은 툭하면 순대를 찾는 주인공에게 종종(자주) 핀잔을 줬으리라. 넌 또 순대를 먹냐고,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내 얘기다). 주인공은 왕순대에게 묻는다. 순대 좋아하세요? 


“순대는 간 허파 다 내주잖아요. 그게 좋아요.” 


순대 갖고 무슨 개똥철학인가 싶지만 주인공은 감동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간 쓸개도 다 빼줄 남자를 기다려 왔으니까. 순대를 나눠먹은 둘은 곧 연인이 된다. 


왕순대는 이름만 순대가 아니라 진짜 간 허파 다 내주는 남자였다. 주인공이 자신을 성추행한 동네 양아치들과 상처를 준 전 남친을 혼내주고 싶다는 말에 <올드보이> 오대수처럼 장도리를 들고 나선 왕순대. 그는 동네 양아치를 처단하고, 전 남친도 흠씬 두들겨 팬다. 동네 양아치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그것을 한 짝(!)씩 잃고, 왕순대는 감옥에 간다. 자신 때문에 기꺼이 인생을 내던진 남자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주인공. 둘은 결혼하고 주인공은 임신한다. 행복할 것만 같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 이후. 임신하면 좋아하던 음식이 싫어진다더니 주인공은 순대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한다. 


혹시 눈치챘는가? 주인공은 순대를 낳았다. 왕순대는 진짜 순대였다. 시련당할 때마다 순대에 소주를 마시던 여자를 사랑하게 된 순대. 그날 순대집에서 사라진 순대 한 줄. 



# 순대를 사랑한 여자 

황당무계한 전개. 이건 내가 대학시절 출연부터 장소 섭외, 메이크업 등 다양한 역할(잡무)로 참여한 단편 영화 줄거리다. 


모티브도 내 이야기였다. 어디 가서 소싯적에 나를 뮤즈로 만든 영화가 있다고 떠들고 싶지만, 연출한 S가 들으면 날뛸 것이다. 내가 왜 주인공으로 출연할 수 없느냐고 따졌을 때 S는 (금자 씨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예뻐야 돼.” 


두 달 사귄 남자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날이었다. 죽네 사네 하는 나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S는 마지못해 자신의 동네 카페로 오라고 했다. 하필 그날 이대 미용실에서 스트레이트 파마에 흑발 염색까지 해 처연함이 배가된 실연당한 애. 그 몰골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내게 S는 애원했다. 차라리 고래고래 욕을 해라! 제발 울지 마! 


궁금하고 억울했다. 어쩌다 ‘또’ 차인 거지? 대체 문제가 뭘까? 내게 이별 통보를 한 남자는 현재 자신에게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고 할 뿐, 나와 헤어지고 싶은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나를 찬 놈과도 친했던 S는 분명 뭔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잊으라는 듯 앞으로 연애에 참고하라는 듯 말했다. “다 필요 없고, 남자한테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없다.” 


자존심? (내가 자존심 건드렸대?) 그게 사랑보다 중요해? (내가 어쨌다는데?) 


S는 과장 조금 보태 남자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존심을 못 버린다고 했다. 


죽어도 못 버린다고? 사랑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S는 조금 고민하더니 눈높이 교육을 시작했다. “사랑에 목숨을 왜 거니? 남자들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대랑 달라. 좋아한다고 간 쓸개 다 빼줄 남자 없다.”  


영화 연출에 관심이 있던 S는 그날 순대 같은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는 여자 주인공을 떠올렸다. 왕순대를 만나 해피엔딩을 맞나 싶지만 순대를 출산하고 정신 차리는 주인공, 블랙 코미디 성격의 판타지 로맨스. 엔딩 크레딧에 ‘ㅇㅇ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ㅇㅇ에게’ 같은 말을 넣었다면 아마 이렇게 썼을 것이다. “정신 차려 김그늘.” 



 

# 지금 사랑하는 순대와 살고 있습니까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순정’. 또 한 번 사랑이 갈 때마다 나의 친구들은 한탄한다. 이 시대에, 이 나이에 순정은 무슨. 사회성 좋은 남자한테는 라운딩에 밀리고, 가정적인 남자한테는 친누나에게 밀리고, 일에 열정적인 남자한테는 야근에 밀리고, 소신이 뚜렷한 남자한테는 지지 정당에 밀리는데? 

 

20년이 지나 나는 안다. 동화 속 토끼도 용왕님께 바치지 않은 간을 현실에서 빼줄 남자는 없다는 걸. 있다 해도 멜로가 아니라 스릴러겠지. 간은 남한테 빼주는 게 아니라 잘 관리하는 것이 진짜 으른의 사랑이니까. 


이별한 친구들은 구슬픈 곡조로 말했다. “다 줄 것 같았지만, 결코 다 주지 않더라.” 


일하는 어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필요한 순간마다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나고, 자신의 신체와 커리어와 인생을 내던지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다. 오죽하면 로맨스물 남자 주인공이 외계인과 도깨비와 좀비가 되었을까?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을 산다. 땅에 발을 디딘 채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고, 노후 대비(!)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순대 같은 남자를 기다리던 나는 ‘인간 순대’를 만났을까? 


순대 잘 사주는 남자를 만났다. 


연애 시절, 그는 너그럽고 우직한 남자였지만 언젠가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별 통보를 받고 집 앞으로 달려가 매달렸지만 다시는 보지 말자며 문을 닫던 그. 순간 자존심 따위 버린(뭣이 중요헌디?) 나는 닫히는 문틈으로 한쪽 발을 넣는 데 성공, 손잡이를 뽑을 듯 세게 잡아당겼다.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 나를 밀고 또 밀던 남자는 결국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역시, 사랑은 열린 문(Love is an open door)!    



# 아주 보통의 사랑, 보통의 계란빵 

<나의 해방일지> 최종회, 기정(이엘)과 태훈(이기우)의 계란빵 세레나데를 좋아한다. 기정이 좋아한다는 말에 겨울이면 삼일에 한 번씩 계란빵을 사다 나르는 태훈. 만날 계란빵만 사 오는 게 미안했던 그는 어느 날 장미 한 송이를 곁들이지만, 장미 머리는 계단에 떨어지고 기정이 받아 든 검정 봉지엔 덩그러니 꽃대만 남았다. 목이 부러져 화병에 꽂지 못하는 장미를 간장 종지에 담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기정. 


우리 사랑이 화병에 우아하게 꽂히는 목이 긴 장미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간장 종지에 지쳐 누워 있는 장미송이가 당신 같고 나 같고 안 쳐다보면 더 빨리 시들까 봐 눈을 떼지 못하는, 난 이런 여자입니다. 


“소고기라고 말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라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가 이어지는 문장에 먹먹해졌다. 계란빵이라고 말한 내 입을 칭찬하고 매일 계란빵을 사 드미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계란빵과 목 부러진 장미를 사랑하는 기정의 순정이 존경스러웠다.  


같이 사는 남자가 생각났다. 꽃다발보다 장미 한 송이가 좋다는 말에 특별한 날이면 진짜 장미 한 송이만 사 오던 남자(이런 말만 잘 듣는다). 소울푸드가 순대라는 말에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삼일에 한 번씩 순대를 사 오는 남자(진짜 이런 말만 잘 듣는다). 


화병에 우아하게 꽂히는 목이 긴 장미와는 거리가 먼 우리의 사랑. 굳이 꽃에 비유한다면 진달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란 의미는 절대 아니고, 화전에도 넣는 식용이니까. 먹는 게 남는 거지. 


태훈이 장미 한 송이를 곁들였듯 같이 사는 남자도 만날 순대만 사 오는 게 미안했던지 요즘 검정 봉지의 부피를 키웠다.  


봉지 안을 들여다보면 순대가 두 팩. 마음이 든든하다. 




덧. 어쩌다 이 글을 읽은 같이 사는 남자는 ‘디테일’을 몰라준다며 섭섭함을 내비쳤다. 자신은 순대를 포장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고. “간 빼고, 내장 많이 주세요!” 그러고 보니 나는 간은 안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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