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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여행자 Jul 07. 2024

나의 명원화실

이 그림책은 몇몇 그림책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았던 책이었는데 주로 글 없는, 그림만 있는 이수지 작가의 책을 몇 권 빌려보면서 이 책이 불현듯 생각이 나 함께 빌렸다. 아직 글 없는 그림책은 조금 어려운 내게 다행히(?) 이 책은 글밥이 좀 많았다. 그래도 보면서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듯해서 빨려 들어가듯 볼 수 있었고, 금세 다 읽었다. 이 책은 그림보단 글이 많은 책이었다.


표지부터 왠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 같은 작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는데 밑거름이 되어준 것 같은 어린 시절 이야기.


이 책에 나오는 여자아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반에서 매번 그림이 뒤에 걸리던 그런 아이. 어떻게 하면 잘 그리는 그림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명원 화실>이라는 못 보던 간판을 보게 되었다. 명원화실을 다니고 싶어 엄마에게 계속 다니게 해달라고 설득을 했다. 거의 일주일의 설득 끝에 명원화실에 등록해서 다닐 수 있었다. 명원화실을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연예인을 만나듯 진짜 화가를 만난단 생각에 설렜던 것 같았다. 명원화실에는 진짜 화가로 보이는 사람, 여드름이 많이 난 오빠, 준호라는 또래 아이, 그의 동생이 있었다. 진짜 화가로 보이는 사람은 진짜화가처럼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고, 얼굴이 길쭉하고 빼빼 마른 생김새였다. 진짜화가를 보자 예상했던 생김새에 그 진짜화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무 때나 그리고 싶을 때 와서 그려라.”


학교에서 끝나자마자 명원화실로 달려갔던 여자아이. 처음이라 뭘 그려야 하는지 난감했다. 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그날 그려야 할 그림에 대해 주제를 이야기해 주는데 명원화실의 진짜화가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렸던 그림을 화실에서도 그렸다. 얼마나 잘 그리는지 진짜 화가에게 보여주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림을 다 그러고 나서 진짜화가에게 보여줬을 때 진짜화가는 아이의 얼굴과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일 몇 시에 올 거니?”라고 물어볼 뿐 그림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다음날 화실에 갔을 때 진짜화가는 아이에게 큰 스케치북을 주며 연필로 바가지를 그리라고 했다. 몇 달 동안 바가지만 계속 그렸고 그 외에 해바라기, 수도꼭지, 포도송이 등을 연필로 계속 그렸다. 그러면서 진짜화가는 아이에게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얼마나 그릴 것이 많은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이는 화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화가가 시키는 대로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했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계속 반복해서 무언가를 보다 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걸 발견하게 되고 차마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은가.


화실에서 진짜화가의 방은 따로 있었다. 진짜화가의 방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던 여자아이. 비록 파이프냄새와 그림그릴 때 쓰는 기름이라는 테레빈 냄새가 섞여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가 좋았다는 걸 보면 진짜 화가가 얼마나 좋았던 건지 절로 느껴졌다. 정말 사람이 무언가에 흠뻑 빠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게 좋아진다는 그런 말처럼 이 아이는 진짜화가를 정말 좋아한 것 같았고, 그를 동경하고 그처럼 진짜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걸 책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가을이 되자 진짜화가는 그림을 잘 그렸던 여드름 오빠옆에이젤을 하나 더 세우고, 연필 대신 물감으로 꽃병을 그려보라고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여자아이는 물감을 쓰게 되니 신났었다. 수채화를 그릴 때 물을 범벅하다가 바닥에 물을 흥건하게 흘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물감으로 계속 그리다 보니 물감과 물감이 만나 알지 못했던 신기한 색을 만들어내는 것에 흥미로웠었다. 그리고 뒤에서 자신의 그림을 지켜보던 진짜 화가의 눈길도 느꼈었다. 진짜화가는 사실 그림을 보면서 ”잘 그렸네, 못 그렸네 “라고 평가하지 않았다는 모습에 ”이 세상에 못 그린 그림은 없다 “라고 믿어주는 모습에 진짜화가가 아마 진정한 선생님이지 않았을까? 이 모습에 미술학원 선생님인 지인이 생각이 났다. 그 언니가 수업하는 모습을 직접 봤던 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흡사 이 책의 진짜화가의 모습 같았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리라고 알려주지 않아. 방향만 제시할 뿐 그 아이가 어떻게 표현해 내는지 존중하는 편이지 “


수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몰라도 아이들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언니의 학생들의 그림을 가끔 보면 그림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었다.


또한 이 책을 보면서 피터레이놀즈 <점>이라는 그림책도 생각이 났다.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하얀 빈 도화지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던 아이. 선생님은 뭐라도 그려보라고 했고, 그 아이는 긴 고민 끝에 그냥 점을 찍어버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점을 보며 ”정말 멋진 그림“이라고 했고 금빛액자에 그 그림을 작품이라며 걸어주셨었다. 그 아이는 그다음부터 점을 더 멋있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점으로 전시회도 열게 되었다. 선생님의 지지와 믿음으로 인해 아이는 성장할 수 있었다. 학생들을 온전히 믿어주는 나의 지인 미술학원 언니처럼, 명원화실의 진짜 화가처럼 말이었다.


겨울이 되었고, 여자아이의 생일이었다. 집으로 온 특별한 생일카드. 진짜화가가 손수 그려준 여자아이를 위한 생일카드였다. 그 카드는 콕콕 점으로 풍경을 표현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저릿저릿했던 참 특별한 생일카드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새 학년, 새 친구, 그리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는데 진짜화가에게 받았던 생일카드처럼 그 친구에게 직접 생일카드를 만들어주느라 바빠 화실을 한동안 가지 못했었다. 이제 화실에 가려했는데 함께 화실을 다녔던 또래친구 준호가 명원화실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화들짝 놀랐다. 명원화실이 있던 건물로 곧장 달려갔는데 검게 그을려 모든 게 불에 타 없어진 명원화실.


이제는 교실 뒤에 여자아이의 그림은 가끔 걸린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여자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깨달은 것 같았다. 명원화실과 진짜화가는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가끔 마음이 먹먹해지면 진짜화가와 함께 야외스케치를 처음 갔던 앞산자락 연못가에 가서 그림을 그리다 온다고 한다.


돈과 명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면 당연히 좋다. 그러나 인생에서 이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던 그림책이었다. 바로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 하는 것 아닐까?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들은 표정도 다르고 일을 대할 때의 자세 또한 다르다.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서 즐겁게 일을 하는 사람과 억지로 해야 하니까 하는 사람. 둘 중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


명원화실이 불에 탔던 그때 이후로 진짜 화가를 만날 수 없었단 이야기에,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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