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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Aug 27. 2022

아폴로_ 나, 인디아나 존스, 이 동네를 접수한다

아폴로

동네 친구들과 종이 인형을 오리고 옷을 갈아입히며 노는 건 언제 해도 재미있다. 하지만 혜정이의 동생 동수는 인형놀이만 하면 짜증을 낸다. 인형놀이를 구경하다가 심심해지거나 누나들에게 괜히 심통을 부리고 싶을 때면 딱지나 구슬을 갖고 놀면 누나들은 상대가 안 되는 바보들이라고 자주 도발했다.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이기에 대게 무시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날은 동수의 말이 내 신경을 긁었다. 아마도 전날 오빠에게 딱지를 30장 이상 잃은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오빠는 승리자의 기품을 보이지 못했고 하루 종일 나를 쫒아다니며 산수도 못하고 딱지도 잃는 바보라며 도발했다. 화가 났던 어제의 기억 때문에 나는 종이 인형을 내려놓고 집으로 달려가 상자 속에 남은 딱지 한 줌을 들고 나왔다. 동수와 눈이 마주치자 스파크가 일었고 나는 낮게 말했다.


"붙어."


천천히 동수 앞으로 걸어가며 손 안에서 정렬시킨 동그란 딱지들이 서로 붙지 않도록 딱지 사이사이로 후우- 바람을 불어넣는다. 바람이 사이사이 지나간 딱지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내는 비장한 소리가 후두둑- 귓속에 박힌다. 주머니에서 딱지를 꺼낸 동수도 자신의 딱지들에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듯 후두둑- 바람을 넣는다. 동수와 나의 눈빛이 부딪힌다. 이번엔 어림없다. 전처럼 친절하게 돌려주는 일은 없을 거다. 한 장도 돌려주지 않겠다. 나를 보던 동수가 씽끗 웃으며 말한다.


"날리기 먼저!"


제길, 순식간에 10장을 잃었다. 어리다고 너무 봐줬던 모양이다. 괜히 종목을 먼저 정하게 했다. 가위바위보로 정할 걸. 동수의 주 종목이 멀리 날리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나도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멀리 날리기 만큼은 동수가 이 동네 최고의 기술자다. 아직 어려서 새끼손가락이 우리보다 좀 더 자유자재로 구부려지는 걸까? 내가 아무리 힘껏 새끼손가락을 뒤로 당겨 딱지를 날려도 동수의 유연하고 강한 새끼손가락을 이길 순 없었다. 작고 동그란 딱지가 느린 듯 우아하고 길게, 그리고 멀리 날아가서 떨어지는 비행실력에 나는 번번이 당하고 만다.


당황한 나는 시간도 벌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아폴로를 한 봉지 꺼낸다. 혜정이에게는 빨간색을, 동수에겐 노란색 아폴로를 한 개씩 건네고 내 것도 챙긴다. 마음이 급한 듯 앞니로 쭉 당겨서 한 번에 먹어버린 동수가 빨리 하라고 다그친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색 아폴로를 엄지와 검지로 신중하게 돌돌 돌리며 작은 빨대 속에 든 내용물을 조금씩 위로 올린다. 동수가 다시 짜증을 낸다. 됐다. 말려 들었다. 나는 아폴로가 빨대에서 잘 빠지도록 헐렁하게 조금 더 주무른 뒤, 조심스럽게 입술에 힘을 주며 쪼오옥 빨아올린다. 그러자 빨대 모양 그대로의 아폴로가 딸려 나오는 걸 본 혜정이가 박수를 친다. 환호하는 혜정이와, 짜증을 내는 동수와, 평정심을 되찾은 나. 바람이 느껴진다. 운의 방향이 다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진짜 봐주지 않겠다.


나는 연달아 벽에 굴리기와 개수 맞추기 종목에서 승리한다. 위기감을 느낀 동수가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많은 옆집 형을 불러온다. 하지만 녀석도 나를 이길  없다. 나는 입으로 딱지를 파하- 불어 넘기기까지 모든 게임의 승리를 거머쥔다. 게임 중간중간 집으로 들어가 딱지를 들고 나온 동수의 얼굴은 벌써 오래전에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동수는 땅에 털썩 주저앉는다. 보아하니 이제  이상 가져올 딱지도 없는 모양이다. 옆집 형의 딱지도 모두 내게 털렸다.


혜정이가 슬쩍 다가와 몇 개씩 돌려주자고 하지만 어림없다. 언제까지 약자에게 베풀어야만 하는 가. 다음은 몰라도 이번은 아니다. 녀석들도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배울 때가 됐다. 먼지를 털고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에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동수가 으아아앙- 눈물을 터트린다. 동수가 데려 온 친구가 반 만 돌려달라고 훌쩍이며 말하지만 나는 돌려주지 않겠다. 녀석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어쩐지 깊은 쾌감이 배꼽 근처부터 가슴 쪽으로 힘껏 솟구쳐 오른다. 승리의 기쁨으로 포효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승리자의 기품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는 인디아나 존스다. 언젠가 KBS <토요명화>에서 본 적이 있다. 밀림에서 멋지게 싸우던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처럼 패배자들 앞에서 나도 짝다리를 짚어본다. 지금 내 몸에서 풍기는 시큼한 땀냄새와 매캐한 흙냄새가 마음에 든다. 하루 종일 골목을 뛰어다닌 전쟁 끝에 얻어낸 냄새들 때문인지, 정말로 밀림 속을 헤매다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불룩한 주머니 속 딱지들을 천천히 만지며 싸구려 과일향이 나는 아폴로를 꺼내 잘근잘근 씹어본다. 달콤하고 작은 덩어리들이 찔끔찔끔 입속으로 흘러나온다. 내 작은 머리통에 딱 맞는 카우보이 모자라도 하나 있었다면 진짜 인디아나 존스 같았을 텐데. 나는 잠시 모자를 눌러쓴 내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채 발을 구르며 울거나 자잘한 돌을 주워 던져대는 녀석들을 내려다본다. 너희들은 내 적수가 못 된다. 나는 텅 빈 아폴로 빨대를 퉷 뱉어버리고 이번엔 빨간 딸기맛 아폴로를 하나 더 꺼내 물고 걷는다. 양쪽 주머니에 가득 찬 작고 동그란 전리품들을 천천히 만지며 북적거리는 슈퍼 앞을 지나 골목을 통과한 뒤 집앞에 선다. 아폴로를 입에 문 채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오빠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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