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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Aug 10. 2022

오징어땅콩_ 아무것에나 의미를 부여하던 자의 최후

오징어땅콩

그날은 하늘이 너무도 맑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이 끝난 나는 친구들과 함께 10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자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이 보였고 운명의 장난은 그 순간 일어났다. 내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자꾸만 나를 힐끗 댔다. 아니다. 내가 아니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남자는 더욱 자주 강하게 나를 쳐다봤다. 심장이 자꾸만 쿵쾅거렸다. 그럴 리 없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마음을 다스렸지만 잠시 후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창 밖을 보고 있어도 온 신경이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이건 꿈이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봤다. 키도 크고 tv에서나 보던 얼굴이 아닌 가!


내가 멍하니 있자 남자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아. 아직도 그의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살짝 열린 창문의 바람 때문에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고 하얀 얼굴의 남자가 나를 보며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뇌리 속에 박힌 그 얼굴은 아직도 눈만 감으면 석고를 뜬 듯 고대로 뽀얗게 되살아 난다. 남자는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나에게 ‘손’이라고 말했다. 햇살이 부서지며 슬로우에 걸린 영화처럼 ‘손’ 이후의 모든 장면이 느리게 흘렀다. 비유가 아니다. 진짜 그랬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바닥 위로 무언가를 오로로 떨어트렸다. 세 개.. 다섯 개… 여덟 개쯤.


햇살을 사이사이에 걸고 토독, 토도독 내 손바닥으로 알알이 떨어져 내리는 것은 오징어땅콩. 그래 그 동그란 과자가 맞다. 하지만 나는 장미꽃잎이나 색색의 영롱한 보석을 그가 내 손에 쏟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황홀한 마음으로 그 아름다운 궤적을 바라보았다. 포물선을 그리듯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그것은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했고 그 어떤 꽃잎보다 풍성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어어, 막 한 알이 밖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 나는 뛰어난 운동신경을 선보이며 잽싸게 단 한 알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귀엽네’라고 말하곤 버스에서 내렸다. 이것은 꿈이었을까 싶었지만 내려다본 손 안엔 보석 아니, 오징어땅콩이 들려있었고 뒤에 앉아 놀란 얼굴로 지켜보던 친구들이 오오오! 소리치고 있으니 분명 꿈이 아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까?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집에 도착한 나는 연습장위에 오징어땅콩을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하나 둘 셋넷 천천히 세어보니 열 개.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열 개가 뭐 그리 부끄러운 거라고 얼굴이 빨개졌대? 아무튼. 나는 오징어땅콩 한 알을 다이아몬드인양 엄지와 검지로 살살 집어 들고 과자 위에 아무렇게나 새겨진 오징어채 무늬를 자세히 보았다. 이상하지. 그렇게 평생을 먹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번뜩이듯 모호한 무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암호. 사랑의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미지의 언어처럼 내 눈을 사로잡았다. 어흐흥, 몸이 배배 꼬이더니 어떤 것은 그림으로도 어떤 것은 글자로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권위 있는 암호학자가 옆에 없어도 무슨 뜻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오묘한 은유로 가득한 한 알을 집어 가만히 입에 넣었다.


콰삭, 한 번에 부서지는 세계에 대해 아는가? 어느 하나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무늬가 무심히 흩뿌려진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둥근 세계. 입안에 넣고 한번 빨면 약한 소금기가 혀끝의 미뢰를 후려치고 오징어의 진한 향이 콧구멍 아래로 몰려든다. 알에 이를 대면 와사삭 부서지며 조각조각 흩어져 입안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파편. 새는 하나의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알을 깬다지만 나는 오직 쾌락을 위해 그 알을 수도 없이 깼더랬지. 부서진 과자를 밀치고 존재감을 뽐내는 매끈한 땅콩을 어금니로 깨무는 순간, 비로소 고소한 향이 퍼지며 오징어를 감싸 안고 폭발하는 궁극의 맛!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오징어를 땅콩과 함께 씹으면 오징어의 질긴 질감이 땅콩의 기름과 만나 굉장히 부드럽게 씹힌다. 오징어땅콩을 먹고 있으니 번거롭고 냄새나게 오징어를 굽지 않아도 된다. 숨만 쉬어도 이리저리 날리는 애증의 땅콩 껍질을 손톱으로 집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건 뭐, 게으른 나에게 딱 맞는 환상의 궁합이 아닐 수 없다.


오징어땅콩 한 알을 입에 물고 거울 앞에 앉자 시간이 뒤틀리듯 버스에 탄 순간부터 저절로 다시 복기되기 시작했다. 손… 손… 손… 귀여워… 귀여워… 헤죽헤죽 웃음이 나왔고 얼굴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아름답게 흩날리던 그의 앞머리와 미소 짓던 붉은 입술이 보였다. 거울 속에 있는 내 콧구멍은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상하지. 나는 입안에 있는 오징어땅콩을 깨물 수 없었다. 그것을 씹는 순간 환상이 깨져버리기라도 할까 나는 입안에서 오징어땅콩이 조금씩 녹게 그냥 두었다. 사랑의 은유로 가득했던 겉의 과자가 사라지자 비밀스러운 심장 같은 땅콩이 오롯이 나타났다. 나는 결심했다. 하루에 한 알씩만 먹어야겠어.


사진-이마트몰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날 이후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탈 때마다 눈알을 이쪽저쪽으로 굴리며 안과 밖을 훑었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 채 일주일이 흘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암호를 잘못 해독했나? 오징어채 무늬 속에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닐까? 접선 장소라던가… 이런, 혹시 내가 시간을 잘 못 계산했나? 이미 일곱 개나 먹어 버렸는데 이를 어쩐다. 나는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입 속으로 사라져 버린 무늬의 잔상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틀렸다. 놓쳐버린 사랑은 이토록 애달픈 것이로구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랍 속 세 개 남은 오징어땅콩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내가 그를 다시 본건 차라리 악몽이었다.

보지 말걸. 암호화되어 풀리지 않는 애절한 첫사랑으로 남길 걸. 달콤한 환상에 젖은 나는 미처 한 집에 살고 있던 하이에나를 잊고 있었다. 완벽한 나의 실수다. 나를 괴롭힐 기회만 엿보는 하이에나가 언제나 내 주위를 돌고 있음을 알면서 나는 왜 놓치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있었다. 거기. 하이에나와. 함께.


남아있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며 힘없이 집으로 향하는 길, 3미터 앞에서 걷고 있는 하이에나를 봤다. 옳다구나! 오늘 기분도 별론데 몰래 다가가 고막이 찢어지게 소리 지르고 튀어야지. 흐흐. 하이에나에게 들킬 새라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느닷없이 하이에나 옆에 후광이 번쩍이는 것이 아닌 가. 힐끗. 어! 그였다. 불길하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모르는 사람들 뒤로 숨어 따라 걸었다. 눈을 뒤집어 까고 한 알씩 아껴 먹는 게 웃겨 죽겠다며 낄낄대는 하이에나의 더럽고도 비열한 웃음. 그리고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이라 말하던 그는 석고상처럼 하얀 얼굴 앞에 손을 대고 아래위로 흔들며 지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와꾸가 진짜 똑같더라! 예쁘다는 말은 도저히 안 나오더라고!”


sf영화처럼 급진적인 원근법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무섭게 노려보았다. 부숴버릴 거야.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와꾸가.. 와꾸가.. 부숴버릴 거야. 똑같애… 똑같애… 부숴버릴 거야.


집에 하이에나는 없었다. 나는 방안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물 따윈 흘리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고 오징어땅콩의 무늬를 노려본다. 이런, 암호가 너무도 쉽게 풀리는 게 아닌가! 오징어땅콩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때를 기다렸다가. 하이에나를. 손봐라. 5초 안에 암호를 파기하라. 나는 세 개 남은 오징어땅콩을 손으로 부셔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릴까, 한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 버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떡배 밥그릇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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