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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Aug 13. 2022

사랑방캔디_ 꼴통과 하이에나의 본격 대결

사랑방캔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내가 왜 오빠 밥을 차려줘야 되냐고!’


엄마는 슈퍼 일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다. 바쁠 때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나가며 오빠 밥 좀 차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물론 나는 하기 싫었지만 같이 먹을 때도 있으니 대부분 차려주곤 했다. 하지만 점점 짜증이 났고 오빠가 더 어린 나를 챙겨야 하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오빠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니 니가 챙겨줄 수 있지 않냐고 물었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있는 반찬에 밥 푸고 국만 데우면 되고. 엄마가 바쁜데 다시 와서 챙기려면 힘들어서 그래.' 엄마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혼을 냈으면 더 따져 물었을 텐데 엄마가 힘들다는 말에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밥 때문에 슈퍼에서 일하다가 다시 오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밥때가 되면 상을 차렸다.


어느 날인가 빼꼼, 방을 들여다보니 오빠는 딱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지가 나와서 차려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짜증 난단 말이야… 음… 잠시 생각에 빠진 나는 조용히 슈퍼로 향했다. 가득 쌓인 과자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음료수 냉장고와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지나니 죠리퐁과 인디언밥이 보인다. 저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고심한 끝에 너무 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죠리퐁? 인디언밥? 분명 하이에나는 나를 비웃으며 와구와구 과자를 퍼 먹을 게 뻔하다. 그것도 보란 듯이 손으로 집어 먹겠지. 난,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게 좋을까… 슈퍼 안의 과자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둘러본다. 최적의 상품을 고르기 위해 슈퍼를 빙글빙글 돌며 심혈을 기울인 나는 마침내 찾아낸다. 이거다! 사랑방캔디와 왕사탕! 어디 할 수 있으면 까드득 까드득 한번 씹어 보시지.


집으로 돌아와 비장한 마음으로 사탕을 꺼낸다. 초록, 빨강, 노랑, 주황 색색깔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사탕을 보자 비장한 마음에 생기가 돈다! 나는 언제나 초록색을 제일 먼저 집어 들지. 초록 다음엔 빨강, 그다음엔 노랑, 주황이 맨 마지막이고 하얀색은 맛없게 왜 주는 건지 먹기도 보기도 싫다. 초록색 사탕 두 개를 연달아 입안에 넣자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배가 되며 이 계획의 끝이 더욱 기대된다. 초록색 사탕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 초록과 빨강은 딸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맛없는 하얀색 사탕만 골라 밥그릇에 넣는다.


저 하이에나는 작은 사탕쯤은 기어이 입에 넣을 수도 있으니 왕사탕도 적절히 섞어 넣고 그 위로 보이지 않게 하얀 밥을 덮는다. 맨손으로 토닥토닥 빈틈이 보이지 않도록 침을 묻혀가며. 뒤이어 진미채와 달걀말이, 배추김치와 고들빼기를 상위에 올리고 마지막으로 따끈한 김칫국 옆에 사탕밥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완벽한 밥상이다! 나는 입안에서 손톱만큼 작아진 사탕을 오독오독 씹으며 모든 준비를 끝낸다. 자, 이제부터 연기가 필요하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지로 끌어내리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웃으면 안 돼! 나는 뺨을 찰싹 때린다. 체머리를 흔들고 눈을 부릅뜬 채로 상을 거실에 가져다 놓은 뒤 오빠를 부른다. 엄청 살갑게.


“옵빠아~ 밥 먹어~”



아무런 의심 없는 얼굴의 하이에나가 방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한 발을 뒤로 뺀 채 문 앞에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자꾸만 삐질삐질 웃음이 나오려 해 아랫입술을 질끈 물어야 했다. 오빠가 숟가락을 들어 밥에 꽂는다. 순간 덜그럭--, 크학!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덜그럭 덜그럭 밥그릇을 이쪽저쪽으로 헤집어 사태를 파악한 하이에나는 헛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너, 이 새끼... 과자도 아니고 사탕을 박아? 와, 이 꼴통 새끼!”


숟가락을 손에 쥔 하이에나가 벌떡 일어선다. “맛있게 자알~ 먹어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슈퍼로 달린다. 뛰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다. 낄낄거리며 뛰는 내 뒤를 하이에나가 미친 듯이 쫓아온다. 으아아아--- 막 잡혔다 싶은 순간 간신히 슈퍼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아빠아아아!!! 세이프---


선반 위로 물건을 정리하던 아빠와, 손님에게 상품을 건네는 엄마와, 건네받던 손님이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얼굴이 벌게진 오빠는 주춤거리며 손님이 나가길 기다렸지만 손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엄마에게 담배 한 갑을 더 주문했다. 씩씩거리는 멧돼지를 등 뒤에 둔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얼른 엄마 옆으로 갔고 손님은 혀를 날름거리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손님의 뒤이은 한마디로 하이에나는 꽁지가 빠지게 슈퍼에서 사라졌다. ‘왜, 오빠가 괴롭혀?’ 오! 나의 구원자! 손님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하이에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민망한 듯 뒷걸음질을 치며 사라졌다. 나는 담배와 거스름돈을 건네받고 슈퍼를 나서는 구원자를 따라가 은혜 갚는 까치인 양, 10원짜리 거스름돈 대신 가져갈 수 있는 초콜릿 몇 개를 건넸다. 구원자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까서 입에 쏙 넣으며 말했다. '니가 오빠를 괴롭히는 것 같던데~'


자초지종을 들은 아빠는 큭큭 웃었고 엄마는 오빠 밥하나 제대로 차려주지 않고 맨날 장난만 친다고 혼을 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다 큰 것들이 동네 창피하게 망나니처럼 뛰어다닌 거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만 아무것도 모른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복수다. 나의 복수는 성공했다. 맨날 차려주는 밥만 곱게 앉아서 먹던 하이에나는 이번엔 꼼짝달싹 못하고 내가 놓은 덫에 걸려 씩씩거리다 돌아갔다. 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에 엄마의 잔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복수를 성공한 기념으로 어떤 과자를 먹으면 좋을지 슈퍼 안을 돌아본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신중하고 심각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느긋하고 여유롭게 과자들을 둘러본다. 무엇을 먹어볼까? 크리스마스에만 뜯을 수 있었던 종합 선물세트를 달라고 할까? 아니다. 생각해보니 지독한 하이에나를 물리친 지금 내겐 사랑방캔디가 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천천히 음미하며 녹여먹는 색색깔의 달콤한 사탕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가장 적절하다. 초록, 빨강, 노랑, 주황색 사탕이 하나씩 내 입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밥상을 앞에 두고 황당해하던 오빠가 생각나 웃음이 난다. 적당히 녹은 사탕을 오독오독 씹어 삼킨다. 이따가 집에 가면 야비한 하이에나가 뭔 짓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즐거운 기분을 만끽해야겠다. 나는 마지막 남은 초록색 사탕 한 알을 날름 입안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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