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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Nov 15. 2019

쌕쌕_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등짝을 내어주다

쌕쌕

"내일 목욕 갈 거야."

 

엄마가 '내일 목욕 갈 거야'라고 말하는 건 음료수 두 개를 냉동실에 얼리라는 특명이다. 방 안에서 열 손가락을 펴고 덧셈 뺄셈을 하며 울상 짓던 나는 엄마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슈퍼 냉장고로 향한다.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덧셈 뺄셈으로 답답했던 내 속을 뻥 뚫어 준다. 나는 쎄하고 서늘한 냉기가 간식이라도 되는 양 훕- 들이마시며 쌕쌕과 봉봉을 하나씩 골라 냉동실에 넣어 놓는다. 

 

엄마가 때를 너무 빡빡 밀어서 늘 가기 싫었지만 한편으로 가고 싶게 만들었던 건 목욕 중간에 마시는 살얼음이 설컹설컹한 쌕쌕과 시장에서 팔던 뜨거운 핫도그 때문이었다. 시원하게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먹던 핫도그는 슈퍼에서 먹는 과자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바삭하게 베어 물면 폭신한 빵이 느껴지고 곧이어 꿈에 그리던 소시지가 입맛을 돋우며 무언가 원대하고 아득한 기운이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내 쓰라린 등가죽과 바꿀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엄마의 목욕가방에는 내가 고른 쌕쌕 하나와 엄마 몫인 봉봉이 꽝꽝 언 채 들어 있었다. 하루 밤새 팽창된 캔음료를 목욕탕 수도꼭지 앞 바가지에 놓아둔 채 탕 속에서 때를 불렸다. 너무 뜨거워 몰래 나가려다 잡히면 온 몸이 뻘겋게 될 때까지 탕 안에 있어야 했다. 엄마가 언제 나갈까 힐끗 보면 엄마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뜨거워진 얼굴에 물을 뿌리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엄마는 일어날 생각이 없고 마침내 지루해진 나는 탕 끝에 목을 기대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매달린 차가운 물방울들이 똑똑 떨어져 내릴 때까지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물방울이 점점 커진 채 흔들흔들 떨리다가 내 이마로 똑 떨어져 내렸다. 앗, 차가워! 시간차를 두고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이 나의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어느 날은 입을 아~~ 벌리고 물방울을 받아 내기도 했다. 물방울이 입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재미있어 아아아~ 입을 오래 벌리고 있다가 잠깐 눈을 뜬 엄마한테 걸려서 찰싹 등짝을 맞기도 했다.

 

등가죽이 벗겨질 것 같은 따갑고 쓰라린 때밀이가 너무 싫었다. 엄마가 먼저 때를 밀고 있으면 나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 안을 오가며 놀다가 쌕쌕이 얼마나 녹았는지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송골송골 땀을 내는 쌕쌕을 들어 귀에 대고 흔들어 본다. 설컹설컹하는 느낌만으로도 어느 정도 녹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녹기를 기다리며 탕 안으로 들어가 물장난을 하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물방울들을 올려다본다.

 

하얀 김이 꽉 찬 곳. 아- 아-. 소리치면 동굴 소리가 나는 재밌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서면 뜨거운 열기와 특유의 탕 냄새가 나를 나른하고 기분 좋게 만든다. 탕 목욕을 끝내고 넓은 탈의실 마루에 앉아서 시원한 쌕쌕을 꿀꺽꿀꺽 마시면 덥혀졌던 몸속의 피가 시원하게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노곤노곤 쪽 빠졌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엄마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마시던 상큼한 주스의 맛. 그럴때면 언제고 마음껏 쌕쌕을 먹을 수 있는 슈퍼집 딸이라서 너무 좋았다. 톡톡 터지는 귤 알갱이를 하나라도 더 빼내 먹으려고 한껏 흔들고 작은 앞니로 잘근잘근 알갱이를 씹던 오후.


'안녕히 계세요!' 목욕탕 주인아줌마에게 인사를 하고 불투명한 목욕탕 문을 여는 순간, 코를 잔뜩 벌리고 저녁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반들반들해진 피부 위로 시원한 바람의 질감이 느껴진 나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가 내 때를 다 벗겨서 바람이 간질간질해!" 

 

피식 웃는 엄마의 뽀얀 얼굴이 목욕탕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물방울 같다. 나는 저 멀리 핫도그 가게로 달려간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본 주인아줌마는 묻지도 않고 뜨거운 핫도그에 설탕을 묻히고 붉은 케첩을 잔뜩 뿌려 건넨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바로 그 순간 잘 튀겨진 핫도그를 바삭 베어 문다. 엄마를 따라 걸으며 핫도그를 반쯤 먹으면 금세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아직까지도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지는 저녁 즈음에 목욕탕을 가는 건 오래전 그 기억들 때문일까? 내 깊은 어딘가에 푸른 저녁의 어느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앉은 것만 같다. 탕 속에 앉아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을 구경하는 취미는 여전하다. 화들짝 놀라던 엄마의 목소리 없이도 이제 그것들을 받아먹진 않지만. 

 

반쯤 녹은 쌕쌕을 흔들어 마시던 내 어린 날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통통하게 빨개진 볼과 때수건 덕에 부들부들해진 몸으로 더운 목욕탕을 나서던 순간, 그때 내 콧구멍으로 들이닥치던 시원한 공기,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나를 감싸던 기억들. 상쾌해진 기분으로 앙, 크게 베어 물던 핫도그와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시장의 풍경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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