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밥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걸 절도라고 보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네네. 맞는 말씀이지만 먼저 제 말을 들어보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혀주시고... 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부터였습니다. 신은 저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주위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곤 합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무시해 버리기 일쑤지요. 하긴, 모든 사람들이 신의 소리를 듣는 다면 세상에 험한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삶은 무미건조해지겠죠. 아니, 나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삶에 활기가 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선생님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실까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세상 아래 신의 자식이 아닌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조금 다릅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동자승으로 절에 들어갔다가 다시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는 이슬람교에 귀의 알라를 섬겼으며 한때는 악마주의에 빠져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주님의 아들이고 동시에 부처의 아들, 알라의 아들, 그리고 사탄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온갖 신들의 사랑과 은총을 받은 저이기에 그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순간 그 장소에 모든 신들의 말을 통합하여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세상에 오로지 저 하나였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아니, 담당자를 지금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먼저 얘기를 나눠 보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되도록 짧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기계처럼 평생을 아침 7시면 눈을 뜨고 업무를 시작하던 제가 오전 시간을 온전히 보내버리고 오후 1시에 눈을 떴다는 것은 어쩐지 기억해 둘 만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1시를 지나 2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도 하늘은 마치 시커먼 저녁인 듯 보였습니다. 으스스하고 불길한 하늘이었죠. 영화였다면 이때 갑자기! 무언가 끔찍한 것이 나타나 내 팔과 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먹거나, 광분한 사람들의 붉은 눈동자가 커다랗게 클로즈업되는 그런 타이밍 말입니다. 아아, 놀라셨군요. 죄송합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네네 알죠. 감히 제가 선생님을 상대로 무슨 장난을 치겠습니까. 그러나 이건 말했다시피 알맹이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벗겨내야 할 껍질 같은 것입니다. 또 압니까? 제 쓸모없는 말속에서 중요한 단서 따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말입니다. 저… 선생님, 옆에 있는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목이 너무 마르네요. 여기 공기가 좀 탁한 것 같기도 하고....
죄송하지만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선생님은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본인이 더 잘 아시겠지만 선생님은 그것에 관심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작업을 하고 계셨다는 걸 제가 보아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지위에서는 하찮은 것일 테지요. 맞습니까 선생님? 대답을 안 하신다면 그렇다고 간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연히 그것을 절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가진 자가 없는데 어떻게 훔친 자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떠오르더군요. 그것들이 바로 징조이자 표식이었는데 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1시의 기상과, 참고로 1시는 13시 아니겠습니까? 소름 끼칠 만큼 붉고 기괴한 하늘과 우중충한 날씨, 선생님과 함께했던 불편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가 그것을 함께 마주하기까지! 신은 제게 알아차릴 수 있는 모든 표식을 곳곳에 두었는데! 어리석은 저는 하루가 다 지난 이제야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계시처럼, 마지막 남은 그것을 본 그 순간. 내가 가져야겠다는 신념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모든 신들이 그것을 가지라고 말했고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선생님과 함께한 제 피곤한 하루가 너무도 의미 없는 날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선생님의 것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는… 어, 아니 잠시만요! 선생님? 저 선생님! 선생님! 그럼 차라리 중간 관리자에게라도 먼저 어! 어! 지금 바로 최고 관리자에게 가시면!
아..씨, …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고 화가 잔뜩 난 엄마가 소리쳤다.
“애 데리고 또 뭔 소릴 지껄였기에 애가 이리 심하게 울어!”
“아니. . . , 고래 한 마리 남은 거 내가 먹었다고 난리잖아. 지 꺼도 아니면서…”
“잘한다! 잘해! 그래서 여섯 살짜리한테 악마가 어떻고 별 해괴한 소릴해! 진짜 어디서 저런 게 나왔지!”
“아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너 일루 와! 당장 이리 안 와! 너 오늘부터 과자고 뭐고 아예 없을 줄 알아!”
사촌동생은 그 뒤로 더 이상 내 곁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고래밥을 다시 먹게 된 건 그로부터 6일이 지나서였다. 마음만 먹으면 까짓 거 맘대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막내 이모랑 동생이 시골로 내려가고 나자 나는 보란 듯이 첫 과자로 고래밥을 집었다.
해저 2만 리 아래의 보물상자를 발견한 네로 선장이 된 나는 천천히 상자를 개봉한다. 뒤이어 보이는 빵빵한 은빛 비늘을 찢으면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온갖 해양생물들의 향이 훅- 내 코를 자극하는 것이다. 아, 이 짭조름한 바다 냄새. 침이 솟는다. 흥, 어린 아로낙스 교수는 진정한 바다의 맛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울고불고 욕심만 부리다가 지 엄마 손을 잡고 시골로 가버렸지. 이제 모든 고래가 내 것이다. 나는 길쭉한 오징어 옆을 우아하게 헤엄치는 통통한 고래 한 마리를 잡아 올린다. 파삭, 가볍게 바스러지는 질감. 부서지는 순간 텅 빈 고래뱃속의 공기가 아작아작 더욱 리드미컬한 재미를 만들어 준다. 잠이 들어 움직이지 않는 불가사리를 잡아 올리며 상자에 그려진 숨은 그림 찾기를 하고 있자니 어깨춤이 절로 난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가, 사촌동생을 울렸던 순간보다 지금의 고래 맛이 끝내준다. 문어와 게, 상어와 복어까지 상자 속을 유영하는 해양생물들을 골고루 하나씩 잡아 단박에 파삭파삭 씹어 삼킨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바다의 감칠맛이 입안에 가득 휘몰아친다. 파도소리가 귓가에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