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막, [분노의 포도] 결말을 앞둔 k는 잠시 책을 내려놓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이 순간을 위해 냉동실에 미리 얼려 두었던 차가운 잔에 맥주를 따랐다. 프스스스- 맥주의 거품이 몽글몽글 반죽처럼 몸을 불린다. K는 뽀얀 살얼음으로 뒤덮인 잔을 들고 감격스러운 듯 단번에 차가운 맥주를 꿀꺽, 들이켰다. 책을 읽는 동안 들끓는 감정들로 달궈진 k의 목울대를 맥주가 시원하게 밀어내며 정신까지 명징하게 만들었다. 감정을 가라 앉힌 K는 사람들이 [분노의 포도]를 두고 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명작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더불어, 그것은 자신이 이제껏 읽은 책 중 세 손가락 안에 들만한 책이라고 확신했다. 단 몇 장. 이제 단 몇 장을 넘기면 불면의 밤을 지탱해주던 극한의 황홀경은 끝이 나겠지만, 그 내용은 마음속 깊이 남을 것임을 떠올리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K는 자꾸만 성급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이며 맥주를 다시 한번 천천히 따랐다. 그리고 그는 잊지 못할 찰나를 영원으로 간직하려는 사람처럼 책의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책을 모두 읽은 K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막 읽은 내용이 꿈이기를. 하지만 꿈이 아니다. 긴 시간을 달려 마지막 순간에 휘몰아쳐야 했던 감동을 그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k에게 폭력이자 고통이었다. 처음에 K는 놀랐고, 다음 순간 당황했다. 순식간에 시커먼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왔다가 사라지자 조금씩 황당한 기분에 휩싸였고 이내 불쾌한 감정이 k를 후려쳤다. 조금 전까지의 기대와 환희를 잊은 채, 불편한 시선으로 책을 노려보던 k는 그것을 힘껏 집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한동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k는 감정을 가라 앉히려는 듯 천천히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다.
조금 진정이 된 k는 구석에 던져진 [분노의 포도]를 집어 들고 시대라는 것을 떠올린다. 분명 그 시대에는 아니, k는 비교적 가까운 시절에도 이 작품에 대해 칭송하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특히나 결말의 압권! 그 완전무결한 감동! 구원과 인류애의 아름다움에 대해. 더구나 어린 시절 k의 엄마 역시 감동에 휩싸인 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던가. ‘정말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결말이구나….’ K는 다시금 혼란에 휩싸인다. 그래, 자신 따위가 뭐라고 이 위대한 문학작품을 이해하지도 못한 주제에 더럽게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 가. 한 순간 k는 자신이 무지하고 야만적이며 인류애를 상실한 저급한 인간이라고 느껴진다. 그래 잘못됐다. 존 스타인벡이 잘 못되었을 리 없으니 k는 분명하게 자신이 잘못된 인간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존재라면 결말의 장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k를 괴롭힌다. 어쩌면 존 스타인벡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인물들이 결말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방법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 응축되었던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 그런 설정을 택했을 것이다. 아아. 다시금 혼란스러워진 k는 이제 문학과 자신이 동시에 역겨워지려는 기분을 느낀다. 문학을 위한 문학. 사람을 위한 문학. 문학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장면 전까지의 모든 기대와 환희, 그리고 밤새 끝도 없이 피어오르던 열망이 순식간에 시궁창으로 쳐 박혀 버렸다. K는 남아있던 맥주를 급하게 들이켠다. 오줌의 지린 맛. 그토록 시원하고 청량하던 음료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미지근하고 찝찔하며 불쾌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K는 싱크대로 달려가 머금고 있던 맥주를 뱉어 냈다.
k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읽어 본다. 하지만 여전히 결말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역시나 그것은 완벽히 남성의 사회에서나 통용될 법한 장면이다. 존 스타인벡이 여자였다면? 그렇더라도 k는 결국 그 시대에서는 나올 수밖에 없는 결말이었음을 인정했다. 씁쓸하지만, k 자신 또한 이 십 년, 아니 불과 십 년 전이었다 해도 그 마지막 장면이 이토록 공포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임을 안다. 어쩌면 k도 그것이 가장 종교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성스러운 인류애의 아름다움과 구원의 메타포.
지금은 놀랍도록 빠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느리지만 거대한 움직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인터넷의 속도, 방대한 정보들,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손을 잡을 수 있는 수많은 연대 속에서 세상은 이미 이전의 세상이 아님을 k는 언젠가부터 느꼈다. 설령 그것이 문학 속 메타포일지라도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을 몇몇 사람들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피력했으며 어떤 창작자들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낀 불편함을 k는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신비로운 문학적 메타포를 걷어내자 k에게 그것은 비위 상하는 장면일 뿐이었다. 하지만 k는 또다시 불편해진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문학이니 문학적 메타포를 드리웠을 뿐인데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과연 정당한 걸까? k는 다시 한번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잠시 후,
k는 문학은 현실이 아닌 문학이므로 문학적 메타포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울리다. 하지만 문학은 시대의 현실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오래 전의 존 스타인벡의 작품도, k 자신이 지금 느꼈던 불편한 감정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k는 생각이 정리된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자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들불처럼 일어 온 마음을 할퀴던 일련의 감정들이 조금씩 사그라들며 이내 고요하고 잔잔해진다. 조금씩, K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자 옅은 숨을 내뱉는다. 자신의 감정이 위대한 작품에 침을 뱉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임을 확신한 K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K는 일어나 저벅저벅 걷는다. 단단하게 닫힌 냉장고를 활짝 연다. 맥주는 하나뿐이 아니다. 잔뜩 쌓여 있는 맥주들에 손을 대어 보니 어느 것은 시원하고, 어느 것은 아직도 미지근했으며 또 어떤 것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K는 가장 차가운 맥주를 골라 잔에 따른다. 푸슈슈슈- 하얀 빵처럼 포실포실 부풀어 오르는 거품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 번에 들이켤 순간을 잠시 기다린다. K는 찰나의 입맛을 다신다. 지금이다. 그는 흰 거품 속에 뜨거운 입술을 담그고 차가운 맥주를 단번에 들이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