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는 작은 가게 앞에 앉아 와삭와삭 과자를 씹으며 하루를 보냈다. 하교후 가방을 던져둔 채로 마음에 드는 과자를 고르거나 엄마가 만들어 준 간식을 먹으며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게 지겨워지면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어떤 하루는 바삭거렸고 어떤 하루는 눅진했으며, 어떤 하루는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찐득하게 잇새에 달라붙어 빠지지 않는 하루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냥 과자가 아니었다. 작은 슈퍼집 막내딸이었던 내게 과자는 사라져 버린 순간에 대한 증거이자 살아 낼 순간에 대한 징표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제품이 출시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아빠는 짐을 싣는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양평동으로 향했다. 롯데와 해태의 제과공장에서 딱 한 박스씩 먼저 사오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새로 구입해 온 과자를 아빠는 내게 제일 먼저 권했다. 어떠냐? 잘 팔리겠니? 누워서 만화를 보고 있던 나는 귀찮다는 듯 일어나 순식간에 위엄 있는 영매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하늘로 손을 뻗어 마치 보이지 않는 영혼과 소통하듯 과자 봉투를 찬찬히 살핀다. 봉지가 파랑색이군. 감자 맛을 넣었군. 설탕과 밀가루가 얼마고~ 따위의 성분을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읽어 내면, 아빠는 마치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연인의 영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맛봐라. 어서.
가늘게 변한 아빠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턱을 내린 채 경건한 포즈로 과자를 하나 집어 올린다. 아빠 코에 살짝 갖다 댔다가 허공에 갖다 댔다가 요란법석을 떨면 아빠는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는 듯 그만하고 빨리 먹어 보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능력 있는 영매 노릇을 조금쯤 더 하고 싶던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과자를 날름 입에 넣는다. 마침내 어린 영매는 고개를 번쩍 들고 외친다. 이것은 된다! 이것은 틀렸다! 이것은 버려라! 그러면 아빠는 늘 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이며 웃었다. 돌팔이!
부모님은 새벽 6시에 문을 열고 밤 12시에 문을 닫는 고된 생활을 이어가며 구멍가게를 제법 큰 슈퍼로 늘려 놓았지만 슈퍼는 몇 년 후에 문을 닫았다. 이제 과자들을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거냐고 묻던 내게 아빠는 몇 달간 먹을 과자들을 가져 갈테니 먹고 싶은 목록을 적어 놓으라고 했다. 새우깡, 짱구, 산도, 코카콜라, 미린다, 그리고 가게 앞 좌판에 늘어 놓았던 아폴로, 어묵포, 달고나, 쫀디기…
며칠 뒤, 목록보다 많은 과자와 음료수들이 슈퍼에서 조금 떨어진 집의 다락으로 박스 채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며 나는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좁은 다락방을 기어 올라 꽉 들어찬 상자들을 둘러보던 나는 이제부터 이곳을 '나의 작은 슈퍼마켓'이라 부르기로 했다.
괜히 다락 문을 열었다 닫기도 하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과자들을 구경했다. 커다란 슈퍼에 널려있던 과자들을 봤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작은 다락방에 쌓여 있는 한정된 박스들은 어찌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 나는 그렇게 나의 작은 슈퍼마켓의 문지기를 자처했다. 오빠와 언니가 먹고 싶은 것을 말하면 직접 문을 열고 올라가 슈퍼집 주인답게 박스들 사이를 유연하게 비집고 들어가 과자를 꺼내주었다. 아껴 먹어! 오늘은 쉬는 날이니 내일 다시 오시오! 나의 작은 슈퍼마켓을 철통같이 지키던 날들.
손쉽게 기댈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자 기쁨의 매개체, 소소한 간식은 심심했던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혼의 몰약과 같다. 그 무렵 나의 환상이 시작된 듯 하다. 과자박스들 사이에서 계몽사의 주황색 명작동화를 뒤적이며 오독오독 간식을 먹던 아이. 다락방은 나의 소우주.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곳에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달래는 동안 다락방은 어느새 가장 넓은 세계가 되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 곳에서 온갖 간식과 감정이 범벅 된 채로 홀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만들던 때를 떠올린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곳. 오래도록 잠겨있던 나의 작은 슈퍼마켓 문을 빼꼼 열면, 아직도 빵과 과자를 와작와작 먹으며 이야기를 짓고 있는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