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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Aug 07. 2022

카스텔라_ 성인용 책을 몰래 읽을 때 필요한 것

카스텔라

그것이 소설책이었는지 어떤 종류의 책이었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이모네 집 주방과 방 사이에 있던 붉은 기둥. 그것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들어찬 책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래부터 끝까지 똑같은 빨간색이었던 걸 보면 아마도 전집이 아니었나 싶다. 재밌는 건 이모네 식구들 그 누구도 그 책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이사 오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다름없었다. 오래된 벽돌인 듯 위장을 하고 있던 그 책들과의 강렬한 첫 만남이 이토록 생생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내가 처음 본 진짜 성인용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혼자 방안에 있기 심심했던 나는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이모를 구경하며 주방과 방을 나눠 놓은 커다란 기둥에 기대앉아 있었다. 무료하고 심심해진 나는 벌렁 누워서 이모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키가 큰 이모는 김치를 쫑쫑 썰고 노란 바가지에 바락바락 쌀을 씻어 냄비에 넣었다. 희고 큰 달걀을 톡 깨고 대접에 후루룩 풀어 달궈진 프라이팬에 촤악- 쏟는 모습을 보던 나는 기둥으로 눈을 돌렸다. 붉은 벽돌. 가만히 보니 벽돌이라고 생각했던 기둥은 벽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빼곡한 빨간 표지의 책들이었는데, 오래되고 색이 바래 얼핏 보면 붉으스름한 벽돌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누워서 제목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제목을 지금 쭈욱 나열하고 싶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헌데 한 권, 업보와 관련된 그런 제목이었던 듯 딱 ‘업’ 한 글자는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이모가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동안 잘 빠지지 않는 책을 힘껏 잡아 뽑았다. 그리고 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이모가 보이는 곳에 앉아 있던 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밀며 기둥을 찔끔찔끔 돌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본능적으로 이것은 그냥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굉장히 소름 끼치고 벌레가 다리를 기어 다니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입술이 어쩌고 가슴이 어쩌고 거시기가 어째서, 근데 또 다르게 생긴 거시기가 나오고 그래서 둘이. 엄마야. 나는 책을 탁, 덮고 슬쩍 이모를 쳐다보았다. ‘어른들은 이렇게 이상한 걸 잘도 보면서 우리한텐 맨날 재미없고 지루한 세계명작이나 읽으라고 한 거야?’ 이모는 이제 막 빨갛게 범벅이 된 손으로 오이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거 뭐, 어른들이 읽는 벌거벗은 임금님은 생각보다 더 굉장한 걸 하고 있었네?’ 으흐흐. 나는 다시 책을 폈다.


밥상을 펴라는 이모의 말에 도둑질을 하다 걸린 듯 화들짝 놀라 책을 숨겼다. 밥을 먹는 내내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맛있어? 이모가 여러 번 물었을 때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왜인지 자꾸 달콤한 것이 먹고 싶었다. 당장! 하지만 밥상을 앞에 두고 사탕이나 과자가 있냐고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설탕을 콩나물국에 들이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달콤한 간식을 가져오겠노라 다짐했다.


그다음이 진짜 다음날이라 이모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뭐 놓고 간 거 있어?’

‘아니, 나 너무 배고파!’

어른의 마음을 가장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흔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허기진 아이의 얼굴이다. 나는 혼신의 연기로 배고픔을 표했고 이모는 허겁지겁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성공.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한..., 한 줌의 잘록한..., 남자의 거대한...,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으로..., 뱀처럼 휘감기는 혓바닥! 쓰읍, 침이 고인다. 이모는 밥을 먹은 뒤 잠이 들었다. 나는 책장을 소리 없이 넘기며 고인 침을 꿀꺽 삼킨다. 이미 경험했던 현상이었기에 챙겨 온 간식을 조용히 꺼낸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나는 슈퍼에서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골랐다. 그리고 결정했다. 숨죽인 채 조용조용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녹여먹을 수 있는 타원형의 두툼한 카스텔라!


이모네 집을 나오며 가슴을 내려다본다. 내 가슴은 그렇지 않은데 꼭 그 책에 나오는 가슴들은 죄다 풍선 같이 크게 묘사한다 말이야. 말도 안 돼. 진짤까? 어쩌면 내 몸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나도 풍선이 될 수 있을까? 아닌데, 목욕탕에서 본 엄마의 가슴도 나랑 비슷한 것 같던데. 늙어서 쪼그라들었나? 혹시 젊었을 땐 풍선 만했을까? 아, 물어볼 수도 없고 낭패다. 좋아. 일단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15년 동안 살아오며 내가 책에서 본 전격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라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서 나온 놀라운 표현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며 심지어 너무도 아름다워 나도 언젠가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글을 쓰면 그처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았던 가. 일단 레오니드 치프킨의 눈부신 문학적 묘사를 보자.


“그는 그녀를 껴안고 가슴에 키스를 하고는 이제 항해를 시작한다. 그들은 물에서 동시에 손을 쭉 내어 뻗고 또 동시에 숨을 폐에 모으면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해변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저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지만, 거의 매번 그는 자신을 옆으로 밀어내거나 심지어 뒤로 가게 만드는 맞파도에 부딪혔다. 그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리드미컬하게 팔을 저으면서 어느 먼 곳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 … 그때, 정점이 아래로 향해 있는 어두운 빛깔의 삼각형이 나타났다. 이 정점은 그가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며, 마치 구름 속에 잠긴 아주 높은 산봉우리가 뒤집혀 있는 듯했다.... 그 닿을 수 없는 바닥에는 그로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심지어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섭고도 달콤한 그런 해답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오, 이 얼마나 예술적인가. 그것은 마치 음악을 듣고 있는 듯 부드러운 선율처럼 느껴졌다. 치프킨의 묘사에 너무도 감동한 나는 일 년 내내 그처럼 써보기 위해 수많은 종이를 어지럽혔고 이런 글을 썼다.


‘나연은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물을 갈랐다. 우리는 맑은 물아래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처럼 서로의 몸을 비비고 빠르게 강을 헤엄쳐 올랐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물을 갈랐다. 부드럽고 따뜻한 물결이 그녀와 내 비늘을 감싸고 흘러내렸다. 그 밤, 작고 느린 물고기 두 마리는 황톳빛 강물 바닥에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이제 없지. 나의 정신은 더럽혀졌고 내게 실망한 치프킨은 내 머릿속에서 짐을 쌌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쭉 더럽혀진 채로 읽고 쓰는 수밖에. 그 후로 이모네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나는 거대하고 붉은 기둥에 사마귀처럼 들러붙어 살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야한 책만을 쏙쏙 뽑아내어 몰래몰래 책을 읽었다. 짐을 싼 치프킨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적나라하고 얄팍했으며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사실적이며 선정적인 묘사들뿐이었다. 입안에 침이 고일 때마다 나는 카스텔라를 입에 넣어 쓰와왑- 흡수시킨 뒤 아무도 모르게 스르륵 녹여먹었다. 아아, 꿀처럼 달콤한 맛이여. 소리 없이 녹아드는 욕망이여. 그때의 다디단 카스텔라, 마술처럼 사라져 버렸던 폭신폭신 야릇했던 빵.


이제는 아무 감정 없이 적나라한 묘사를 누구보다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아직도 마트를 둘러보다가 종종 눈앞에 폭신한 카스텔라를 보면 사라졌던 그때의 기분이 묘하게 떠오른다. 은밀하고 달콤하게 야금야금 녹여먹던 그 시절 숨죽인 본능의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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