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혜선 Aug 09. 2020

나답기 위해 '홀로' 채워야 하는 시간

자아성찰을 위해 혼자 보내는 시간의 중요성

이어폰을 꽂고 음악 소리를 높인다. 발밑을 보며 걷다 차츰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고, 걸음에 속도가 붙으면 마음이 닿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문제를 가득 머리에 담고 나왔지만 걷다 보면 문득 해결책이 떠오르거나 별것 아닌 일들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다시 신호를 기다리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놀이터와 상점을 지나며 비워진 공간에 각기 다른 상념들을 채워 넣는다. 운동화를 신고 편한 옷차림으로 걷는 것도 좋지만, 실은 혼자이기 위해  이렇게 걷는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영화관에 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홀로'인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이십여 년 전에는 낯설었다. 친구가 없거나 별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혼자인 사람은 다른 이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이유도 계기도 가물가물 하지만 나는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100석도 채 되지 않는 동네 작은 영화관을 찾았고 그곳에서 조조영화를 봤다. 자리는 가능한 한 맨 앞자리를 선택했다. 첫 시간 첫 줄에는 대부분 사방에 사람이 없어 극장 전체가 온전히 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목은 아팠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가득 찬 화면은 언제나 황홀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때가 다가오면 여지없이 심장이 뛰었다.  극장에 혼자 온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혼자 영화 보는 것을 포기했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홀로 영화관을 찾았다. 아직도 가슴 졸이며 두 눈 가득 담아 보던 "로미오와 줄리엣", "비트", "굿윌 헌팅" 등의 영화가 기억에 남는데 영화의 내용보단 그 시절의 극장 풍경과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나프탈렌 냄새에 더 가까웠던 극장의 방향제 냄새가 더 아련하게  남는다.  


혼자 외출하겠다고 말씀드리면 북적북적한 것을 좋아하시는 엄마께서는 걱정과 의심을 고루 섞은 어조로 늘 말씀하셨다. "혼자 무슨 재미야". 그럼 난 사춘기 소녀의 예민함을 가득 담아 "혼자 영화 보고 싶어!" 하며 퉁명스럽게 답하곤 했다.


결혼 전에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강사로 일하며 이곳저곳에 다니다 보니 하루 4시간 이상씩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운전을 했다. 그럴 때면 당연한 의례 인양 이어폰을 꽂았다. 시간이 촉박하거나 누군가와 시간을 맞추기 번거로울 때에는 적당히 혼자 끼니를 때웠고, 지금 바로 뭔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혼자 먹으러, 보러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하는 일들이 일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딱히 의미를 두진 않았고, 가끔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길뿐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육아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이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음을 알았다. 온전하고 편안하게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없이 가족들과 부대낀 날에는 부지불식간에 부정적인 말을 입 밖으로 내거나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표출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의 모든 감정을 당연히 받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별것 아닌 일로 남편과 다투고, 아이는 괴물이 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은 '육아 우울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 양상과는 달랐다. 육아로 지쳐 몸이 힘든 것일까 싶어 특별한 활동 없이 아이와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보았지만 무거운 마음과 피로는 풀리지 않았다.  내가 평온한 상태로 유해질 수 있는 때는 잠시나마 '홀로'있는 시간을 보낸 후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은 날은 남편과 아이가 더 애틋하고,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홀로'일 수 있기 위해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남편은 육아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혼자 아이를 보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굳이 왜 '혼자'여야 하는지에는 의문을 갖었다. 역시나 혼자 무슨 재미가 있느냐며, 바람을 쐬고 싶다면 가까운 곳으로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함께 산책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는 것을 보았지만 그 시간들은 나를 본래의 나로 되돌리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혼자 시간을 보낸 후 느꼈던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남편에게 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몇 시는 엄마의 시간'이라고 정해져 있다면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육아의 특성상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평일에는 아기가 낮잠 자는 시간, 주말에는 가능한 한 오랜 시간을 원칙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평일에 아기가 자는 시간은 소리 없이 조용조용 다녀야 하고, 꼭 해야 하는 집안일이나 잡무가 있는 경우가 많아 만족할만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주말을 기다렸다. 아이가 물병을 들고 아빠 손을 잡고 신나게 나가면 나 역시 입이 귀에 걸렸다. 집안에서의 시간을 지루해하며 "밖에! 밖에!"를 외치던 아이가 소원 성취한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쁘고 시간을 오롯이 나에게만 쓸 수 있게 된 상황도 행복했다. 그 혼자인 시간에 나는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글을 썼다. 음악을 들으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릴 때도 많지만 가급적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보낸 후 돌이켜 보면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었다.  


전날, 그 주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하며 어떤 일에 웃고 상처받았었는지 떠올려본다. 좋지 못한 감정이 남아있다면 어떤 점이 그랬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나를 살피는 일',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며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 나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으며 성찰을 하는 일이 기분전환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내 시간이 사라진 후 알게 됐다. 의 감정과 가치관이 어떤 시간과 과정을 통해 회복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귀하게 얻은 나의 시간은 말없이 홀로 보낸다. 걷다 보면 글감이 생각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온다.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면 침착해지고, 케이크나 마카롱을 먹으며 행복했던 일이 떠오른다.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들으면 깨닫게 되는 바가 있어 지금 이 순간이 전부임을 상기한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몇 시간의 시간 동안 나는 보고, 듣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듬어 머리와 마음을 채운다. 그리고 그 힘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주변인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보낸다. 마음을 채우는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웃고 나를 따라 남편과 아이도  웃는다.


가끔 혼자 시간을 보낼 때면 죄책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남편이 피곤하지 않을까, 아이가 쓸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배우자와 엄마로서 건강하기 위해서는 '나'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무엇보다 내가 그러한 사람임을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됐다.


'나'이지만 결혼과 출산이라는 약속으로 나의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하며, 나의 방식으로 나를 지켜보기로 한다.





지금 자유시간 세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업무, 집안일 등 '일'은 안됩니다.)

그 일은 함께하는 일인가요? 혼자 하는 일인가요?

내 공간에서 하는 일인가요? 일상을 보내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인가요? 

나를 알아줄 수 있는 것은 '나'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말고, '나'를 채워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