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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Jul 11. 2021

격대 육아

남편과 가끔 어릴 때 무슨 일로 부모님께 혼이 났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90년대 그리고 그 이전 세대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일명 사랑의 매로 다스려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알림장이나 성적표 아래 칸에 부모님이 선생님께 드리는 말씀 같은 것이 있었는데 반 친구 들 것을 보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엄한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와 같은 말들이 있었다. 자식의 바른길을 위해서라면 암묵적으로 체벌에 동의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선생님과 부모님,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가하는 정서적, 물리적 행동에는 당위성이 있던 시절이었다. 청소년기 반항심은 당연히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무서움’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의 매가 아닌 어른의 피곤함과 감정이 실린 체벌도 분명 있었다.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여하튼 추론컨대 부모님도 시부모님께서도 한때는 무서운 분들이셨다. 손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집에 살며 격주로 시댁에도 오가는 생활을 했는데, 때마다 우리 아드님은 절대 권력의 왕이 되셨다. 손자가 오기로 한 며칠 전부터 좋아하는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곳곳을 다니시고, 잘 먹는 음식은 박스 채로 준비하셨다. 뭔가를 한입이라도 입에 물고 오물오물거리면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으신다. 만화를 감상하실 때면 등을 편안하게 쿠션으로 바치고 무릎은 얇은 면 이불로 살포지 감싸고 눈은 만화, 입은 자동 간식 투입이다. 더우면 에어컨이 있어도 손부채, 추우면 온수 매트에 이불까지 대동된다. 아이가 짜증을 내고 물건을 망가트려도 화내시는 법이 없다. 오로지 미소 한방, 엉덩이춤 한 번이면 게임 끝이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나오면 용돈도 술술 나온다. 


나는 보고 있노라면 조바심이 난다. 간식을 저렇게 많이 먹으면 밥을 안 먹고, 밥을 안 먹으면 어른들은 한없는 걱정을 쏟아내신다. 또 간식을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고 나는 병간호에 잠을 못 이룬다. 만화를 저렇게 보다간 잘못된 습관이 생길 것이며, 버릇없는 행동을 매번 받아 주다간 정말 버릇없는 아이가 될 것 같아 두렵다. 무엇보다 부모로서 나름의 육아 철학과 방식이 있는데 어른들께서는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하시는 듯하다. 과거 그 무섭던 분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셨는지 알 길이 없다. 


양가 집안에 근 20년, 부모님께서 우리를 낳은 후로 치면 40년 만에 아이를 보셔서 그러신 건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엇비슷하다.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육아 방식은 어느 한쪽이 이해하지 않는 이상 좁히기가 어려운 것 같다. 사실 이해라기보다는 한쪽이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일을 하며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는 경우 서로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끝이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왕왕 듣는다. 사랑하고 아끼는 건 같은데 방식이 다르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다. 


마음이 복잡해지기 전까지 우리 집에 살며 가장 좋았던 것은 부모님께 손주를 마음껏 보여드리는 일이었다. 하루는 아빠께서 퇴근 후 말도 잘하지 못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오늘 우리 손자 보고 싶어서 혼났네. 그리웠어.” 하시는 데 깜짝 놀라서 아빠의 얼굴을 다시 올려보았다. 연인에게나 할법한 저런 몽글몽글한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걸 40년 만에 처음 알았다.  


‘격대 육아’라는 말을 들었다. 부모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돌봐주시거나 키워주시는 것인데 이렇게 조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성도 좋고 성적도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오바마, 빌 게이츠 등도 여기에 해당하는 데 조건 없는 끝없는 지지와 사랑이 그들을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든다고 한다. 


내 생각은 옳을까? 그렇다고 믿을 뿐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을 뿐이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아이가 선택하고 싶지 않은 방식일 수도 있다. 아이의 짜증 시간과 강도가 올라가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한다. 화를 내든 무표정으로 대하던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항상 부족한 엄마다. 대화가 되기 시작한 후부터 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며 “엄마, 왜 화났어요?”하고 묻는다. 아이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께서는 한결같으시다. 나 어릴 땐 왜 그렇게 안 해주셨나 싶을 정도로 온화하고 인자하시다. 모든 것에서 내가 옳은 건 아니다. 우리 집에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느껴보지 못했을 안정감이다.  


나도 할머니가 되면 온화해질까? 풍파를 이겨낸 노년의 눈으로 아이를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만화를 보느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손주를 한없이 바라보는 엄마, 아빠 그리고 시부모님을 보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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