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장황한 16년의 유학고민서사 (1)
무슨 영국이야,
마흔에 갑자기 영국은 좀 그렇지 않아?
갑자기?
갑자기…
글쎄 나에게 ‘갑자기 영국’이라고 말했던 걸 보면 그(혹은 그녀)와 나의 친분은 그리 깊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정확하게 칭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다… 미안 그리고 안 미안. 그래도 나름 제목에 그대의 한 마디가 올라갔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기를. ‘누군가’여.
영국으로 공부하러 떠난다고 했을 때 동료들, 친척, 친구들에게서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지만 저 한마디가 가장 깊게 박혔다. 그 자체로 내가 고개 돌리고 싶은 한국의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흔에’ ‘갑자기 영국은’ ‘좀 그렇지 않니’
마흔에: 네가 떠날 거면 진작 떠났어야지/ 어릴 때 유학이야 값지지/ 나이를 생각해야지/ 결혼은 안 할 거야/ 너 지금 결혼해도 이미 노산인데/ 유학 가기엔 머리가 굳었지/ 뭔가 도전하기엔 좀 늙었지 / 애도 아니고/
갑자기 영국은: 아니 나랑 상의도 안 하고/ 가까운 일본도 중국도 아니고/ 하필 물가 제일 비싼 나라로/ 돈은 있고? / 사람들이 그러는데 영국 별로래/ 근데 너 영어 잘해?
좀 그렇지 않니: 생각 다시 해봐/ 부모님 연세도 있으신데/ 남들 다 하는 석사가 뭔 의미인데/ 번 돈 다 탕진할 셈이야? / 결혼 자금을 다 여기에 붓다니 무슨 생각이야 /
와, 기껏 영국 유학이 이렇게나 많은 서사를 몰고 들어올 줄이야(사회학자였다면 논문을 쓰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적지만 저 이야기들은 여럿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 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가 정확하게 ‘발제’ 한 것뿐.
위에도 적었듯 나와 조금이라도 깊게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영국(혹은 미국)에서의 삶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염원해 왔는지 알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니까 아마도 15~16년간은 유학 혹은 이민이라는 단어를 마음속 방 한 칸에 달고 살았다. 아니, 그 방은 이미 있었지. 계속 잠가 두었을 뿐. 그러니 적어도 ‘갑자기’는 아니다.
미국에서 잠시나마 살았던 경험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런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때 이미 [더 많이 부딪혀 봐야 할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던 것.
‘그렇게 좋으면 계속 있지 뭐 하러 돌아왔나’라고 묻을 수 있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머물고 픈 마음에 비례해 그 당시 느꼈던 언어의 근본적 한계 -그냥 게을렀던 것- 와, 심리적으로 단단하지 못했던 약한 지점 등이 맞물려 취업비자를 약속받았음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하하)
짧은 그 미국에서의 삶 이래 봤자 사실 대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의미가 있기에 반추해 보기로 한다.
2007년의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한 신문사 계열 잡지사에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업무시간 대비 대우도 괜찮고 기자 선배님들도 다들 눈이 초롱초롱, 배울 점이 많아 이 직장에 평생 머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면서 나는 벌써 지루해졌다. 무언가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업무는 생각보다 단순했고 도전을 할 만한 계기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 외에 다른 팀원들이 모두 50대 이상의 중년 분들이었으니 아마도 이 일은 더 나이 들어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배부르고 등 따시니 복에 겨웠던 듯. (이에 더해 퇴근할 때마다 늘 우리 회사 앞에서 보이콧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애사심이 점차 부끄러움 내지는 민망함으로 바뀌기도 했다… 너무 많이 말하면 어느 신문사인지 알게 될까 봐 여기까지만. 물론 지금도 여전히 당시 함께 한 신문사의 선배들을 존경한다)
‘진흙 밭에 뒹굴더라도 아직은 도전과 실패가 필요할 때다’라고 마음먹은 이후 나는 해외 오퍼를 열심히 알아봤고 마침 인턴 공고가 뜬 LA지사의 한국 신문사로 지원을 넣었다. 당시 지사장님이 직접 한국으로 면접을 오셨는데 ‘왜 미국에서 일하고 싶냐’는 질문에 밝게 웃으며 "미국은 베이글이 맛있잖아요"라고... 지금 생각하면 나사가 한참 빠진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을 아주 흡족해하시면서 내 이름 옆에 0을 크게 치셨던 생각이 난다. (당연히 질문이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 인간 좀 특이하네 라는 의미였을까?
조마조마한 몇 주가 지나고 드디어 합격 전화가 왔다! 나는 천장에 닿을 듯 방방 뛰며 외쳤다.
“엄마!! 나 이제 미국에서 일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부둥켜안고 진심으로 기뻐하셨지만 거실에 걸린 달력에 매직으로 D-Day를 표시하면서부터는 사뭇 침울해지셨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변화도 캐치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엔 마냥 신나 있었다. 앞으로 신나고 기쁜 일만 있을 것 같은 부푼 기대와 벅참만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웬걸, 잘 만나던 남자친구가 내가 미국으로 떠난다고 통보하자마자 몇 번이고 진짜냐며 확인하더니 별안간 잠수를 타버렸다(쓰면서 느꼈지만 이 ‘통보’가 우선 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내 결정을 존중해 줄 거라고 믿었다).
요새 말로 잠수 이별이라고 하나? 그는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살면서 그렇게 힘들어 보긴 또 처음이었다. 잠수라니.
들떠서 준비하던 미국행은 어느새 악몽같이 변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받지도 않는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 반응도, 소용도 없었다. 수신자가 사라진 화 는 나에게로 향했다. 사람 하나 버리면서 까지 갈 일인가. 지금이라도 미국행 오퍼를 물러야 하나 내 선택이 잘못된 건가 등등 매일 나를 짓누르는 수많은 생각들로 그 매일의 하루도 행복하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던 한 달이 지나고 떠나기 하루 전 날, SK에서 커플요금제가 해지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빨리나 끊을 것이지…
인천공항으로 향하면서 보낸 나의 마지막 문자에 그는 드디어 답이란 걸 했다. ‘미안해, 건강하게 다녀와’
때 마침 예약해지를 걸어 둔 나의 핸드폰이 끊겼다. 나는 정말이지 뭐 하다 만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내 쪽에서만) 매듭짓지 못한 관계의 실타래를 한 웅큼 손에 쥐고 그렇게 도착한 미국에서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회사의 환영식도 시큰둥, 그렇게 염원하던 대형마트 멤버십카드 선물도 의미가 없었다. 의욕도 없고 우울하니 입사 동기들과도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으면 선배들이 나를 따로 불러내 이제 그만 일에 집중하라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지성과 인성은 다소 부족하나 사회성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내가 천천히 사회 부적응자로 변해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6개월이었다. 와우! 말 그대로 X신이었다!!!
안돼, 과하게 가혹하지 말자.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의존적인지 그리고 찌질 한 지를 진정 알게 되었으니 나름의 성과라면 성과다. 인간은 역시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다.
여하튼 나는 (좋게 포장해서) 직원으로서의 낮은 성과로 회사를 더는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베이글 덕에 나를 뽑아주신 지사장님께도 퍽 송구한 채로 도망치듯 신문사를 나왔다. 그리고 오래된 친구가 살고 있는 어바인이라는 동네로 이사했다. 앞의 파란만장한 6개월에 비해 이후의 6개월은 상당히 평범(?)했다. 한인 타운을 벗어나 집세가 2.5배에 달하는 동네로 이사한 것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새로운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고 만나는 사람들도, 환경도 달라지니 그제야 매일이 다시 즐겁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송별회 자리였다.
"너, 아직은 괜찮지만 언젠가는 그 순간이 올 거야"
"무슨 순간?"
"영어가 끔찍이 싫어지는 순간"
"에이, 그런 게 올 리가... 영어를 좋아해서 와 있는 건데"
"나도 그랬지... 근데, 그런 순간이 있어. 영어 때문에 토할 거 같은 순간"
"뭐라는 거야... 잘 준비해서 가기나 해! 편지하고!"
그 당시에 나는 뒤늦게 경험한 '새로움'들에 취해있었기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뭘까? 토할 것 같은 순간이라는게.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그 순간이 찾아왔으니까.
친구가 떠나고 두 달 쯤 지났을 때일까, 고지서를 확인하는데 핸드폰요금제에 뭔가 착오가 생겼는지 요금이 어마하게 빠져나갔다. 컴플레인을 하러 갔는데 통신사 직원이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계속 맴돌았다. 뭐지, 이런 일은 잘 없는 편인데. 손짓발짓을 다 섞어가며 나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직원은 그건 네가 세팅을 잘못한 거라면서 자기가 도울 일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가 사용하지도 않은 300불을 낼 이유가 없었고 계속해서 이를 설명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어느 덧 해도 저물고 있었다. 차도 없는 나는 버스 시간까지 걱정해야 할 터였다. 슬슬 짜증과 화가 몰려오며 서럽기까지 했다. 얼굴에 열이 화악 달아오르며 울음을 애써 참고 있자 다른 직원들이 달려와 나를 위로? 내지는 안정시켰지만 나는 그 순간, 그야말로 토할 것 같았다. 아니, 토해도 그놈의 A, B, C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봐, 토할 것 같은 순간이 온다니까'
친구의 말이 갑자기 맴돌면서 어지러웠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아니, 그냥 이 땅을 뜨고 싶었다.
나는 여기 왜 있는 거지? 요금제 하나 못 바꾸면서 뭘 하자고 여기 남아있지? 얘네들은 도움도 안 될 거면서 내 주변에 붙어서 뭘 자꾸 씨부렁 대는 거지, 뭐가 아유 오케이야. 내가 오케이인 거 같아 보여?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대처했는지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 되어버렸음에 틀림없다. 드문 드문 기억에 내가 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고, 친구가 뭔가 한참 설명을 한 뒤에 나의 요금제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약 한 달이 지나서야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나 그만 한국으로 돌아갈래"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이 역시도 나중에 친구가 해 준 이야기다.
역시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이후에도 회사는 잘 다녔다. 편집 디자인 일도 재미있고 나름 즐겁게 근무하며 능력도 인정을 받을 즈음되니 비자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즐겁든 어쨌든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인 이상 비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취업비자(H비자)를 내준다며 한국을 들렀다가 오라고 했다. 감사한 제안이었다. 당시 집은 임시 숙소였기에 집에 있던 집기며 큰 짐을 먼저 한국으로 부쳤다. 몇 달만 한국에 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완전히 새 삶을 꾸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나의 마음 한 켠에서는 이미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결심이 섰던 것일까.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기억도 못하고 있고 어떠한 확신도 없던 걸 보면 그 당시의 나의 상태라는 것이 얼마나 출렁이고 있었는지가 보인다. 토할 것 같던 순간을 경험한 뒤로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80%에서 30%까지 떨어졌으니까.
자랑은 절대 아니지만 살면서 어이없이 한심한 결정을 한 일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못해도 그중의 4할은 이 시기, 한국행 결심 이후 일주일 동안 한 결정들이었다.
1. 이때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 미국에서 유럽 가는 비행기가 30만 원 밖에 안 하네?? 게다가 유럽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도 항공 마일리지 차감은 같네? 최고인데?" 하며 유럽행 결심 >> 불행의 전조
2. 남들 다 가는 영국 In 루트 말고, 기왕이면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독일로 들어가자! LA-프랑크푸르트 항공권 발권>> 불행의 시작,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영어가 전혀 안 통함
3. 어차피 한 달 정도 여행인데, 한국으로 다 부치기엔 배송비가 아깝다. 어차피 옷이며 액세서리며 유럽 가서 다 쓸 텐데 그냥 트렁크에 다 넣어서 가지고 가자 >> 슈퍼 한심, 공항도착하자마자 후회
4. Lonely Planet 2004년판 9불, 2008년판은 21불?? 뭐 얼마나 달라졌겠어. 그냥 싼 거 사자>> 제일 한심, 1년만 지나도 문 닫는 숙소 속출... 예) 새벽 2시에 떨어진 체코에서 굽이 굽이 골목길을 돌아 찾아간 숙소, 거미줄 쳐져 있고 문 닫아 있었음
5. 숙소예약? 뭐 대강 영어 하면서 그때그때 바로 숙소 들어가서 방 달라고 하지 뭐. 미리 예약했다가 마음 바뀌면 환불도 안되고 >> 옥토버페스트 기간에 호스텔~호텔 통틀어 모든 숙소 방 없음. 2회 노숙으로 이어짐
6. 노트북 가방? 비싸네. 그냥 파리지앵처럼 멋지게 옆구리에 들고 다니자 >> 트렁크 2개, 백팩 한 개, 옆가방 한 개에 + 노트북 하나까지 더해지는 결과 초래
이외에도 유럽여행에서 풀 썰이 너무나 많지만, 그러한 이야기들은 유학과는 크게 관계가 없으니 나중에 번외 편으로 따로 풀도록 하자.
그렇게 우당탕탕 유럽 10개국을 한달 반 동안 돌고 한국에 도착한 나는 얼마나 즐겼는지 10KG가 불어있었다. 언제 여길 또 오겠어하는 생각에 신기한 건 보이는 대로 사 먹은 탓이다. 먹다가 지쳐 침대에서 잠이 들곤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신 아버지는 사실 나를 못 알아보셨다고 뒤늦게 고백하셨다...
여하튼 나는 돌아왔다.
달았다. 한국은.
미국에서 알파벳을 토하며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나는 유럽을 도는 내내 여전했던 그 어지러움을 스파게티와 피시 앤 칩스, 그리고 햄버거와 맥플러리로 달랬다. 아니, 찍어 눌렀다고 봐야 맞다.
한국에 도착하자 어지러움은 씻은 듯 사라졌다. 매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가족, 친구, 음식, 내 방. 게다가 무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 이렇게 달디 달 수가.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절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첫 환영식 날에 신문사의 선배가 나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한인 사회에서 하는 말이 있어. 미국은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즐거운 지옥이라고"
아, 결단코, 단연코 그렇다.
나는 다시 이 즐거운 지옥의 루틴에 빠져든 것이다.
나는 죄송하지만 '올해에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메일을 회사에 보냈다. 이 관용적인 회사는 1년 후에 돌아오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조금만 더 놀다가, 조금만 더 이 달콤함에 빠져 있다가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1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그렇게 나는 내가 가려던 곳을 잊었다.
이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회사의 메일도 2년이 지나서야 스팸함에서 꺼내 읽었다. 이미 나는 퍽무책임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지났다. 나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고, 아니 겪었고- 지난하고 아프게 또 다른 형태의 이별을 경험하며 이 '즐거운 지옥'의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다시'라고
잠깐이나마 무엇들로 채워졌던 그 꿈의 방을 다시 헐겁게 잠가 두고
이따금
'그래도, 언젠간'이라며 잠시 열어보았다가
'아직은'이라며
다시 닫기를 수 차례. 어느덧 16년, 열 여섯해의 먼지가 방 앞에 텁텁하게 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