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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ho Dec 15. 2024

김치녀는 웁니다

너는 공부를 해라 나는 소금을 뿌린다

"시호, 너 한국에서 왔다며? 나 김치 만드는 것 좀 알려줘!"


     오, 그렇구나. 근데 난 김치 안 좋아하는데? 그리고 만들어 본 적 없어.


                     "뭐? 너 한국인 아니었어?"


                        응, 근데 안 좋아하는데?  


                                     "????"


 



아니, 제발 Asian에 대한 그런 편견을 거둬줘.

중국 사람이면 응당 쿵후를 할 줄 알 거라거나 하는...


독일 사람이면 맥주에 환장할 거라거나 (근데 이건 경험상 맞는 듯...)

미국 사람이면 무조건 맥도널드를 좋아할 거라거나 (케바케)

이탈리아 사람인데 파스ㅌ , 아 이건 좀 너무 갔나.

내 동생은 일본에서 7년을 살았지만 초밥을 안 먹었다고! 생선 안 좋아해서.

놀랄 일인가? 음. 이건 좀 놀랍긴 하네.


도대체 왜 한국인= 김치 밖에 없는 거냐! K-POP도 있고 (응 진부해) K-Movie도 있고! (오징어게임?)

나는 미국에 살 때도 김치 안 먹었다고!


나에게 김치라는 것은

아주 가아끔 삼겹살에 곁들이거나, 편의점에서 급히 뭔가를 골라야 할 때 그나마 실패확률이 낮은 김치볶음밥을 고르는 정도?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김치도 건드린 적이 없고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

자취할 때도 냉장고에 김치가 있던 적은 없다. (냄새 배니까...)  마늘 냄새 때문에 먹자마자 이를 닦아야 하고, 이빨에 고춧가루 끼이는 것도 고민해야 하고... 애정하기엔 번거로운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런

내가!


영국에 와서 고작 2주, 아니 실은 1주일 만에 '김치' 너란 녀석이 이토록 그리워 지다니 말이 되는가!!


근데 말, 되더라.

영국음식 맛없다고들 워낙 해서 설마 그럴까 했는데 (설마에 사람 잡혔다)

맛을 떠나서 영국의 음식은 그 스펙트럼이 너무 좁달까...

애초에 시그니쳐 디쉬랄게 그다지 많지도 않지만- 피시 앤 칩스, 민스파이 그리고 애프터눈 티?- 그 몇 안 되는 것도 별로 내 취향이 아닌 데다가 한두 번 먹으면 그냥 족한 정도의, 너무 두텁고 헤비 한 느낌이다. 그 나라의 음식은 그 나라 사람의 성향을 닮아있다던데 아주 조금 그런 것도 같고...?


그 탓인지 거기서 거기인 음식에 일찌감치 약간 물려버린 것 같다. 김치가 절실했다.  남정네도 아닌 김치에 이다지도 집착하게 된 내 모습이 스스로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고 봐야지.

우선은 캠퍼스 내의 중국 슈퍼를 뒤져 김치 비슷한 걸 찾아냈다.


왜 김치가 아니고 비슷한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국인 김치'라고 쓰인,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이름의 이 녀석이, 냉장고도 아닌 일반 매대에 건조 버섯들과 함께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김치는 발효식품인지라 온도에 민감한데 상온에?

게다가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는지 부옇게 앉은 먼지까지… 방금 막 박스를 터 진열하고 있는, 봉지가 반짝반짝한 불닭볶음면과의 인기 차이를 알 만 했다.

흠 게다가 전 재료 중국산.

역시 이건 아닌 거 같아. 그래도 자존심이란 게 있지.

분명 냉장고 칸 어딘가에 한국김치가 있을 것이다. 눈을 부릅뜬다.


찾았다! BB고! 그럼 그렇지. 당당하게 군만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BB고 맛김치가 보인다. 이거지. 역시 한국인은 CJ...

응?

맛김치 100그램에 7파운드(14,000원)?????

잠시만.

100그람이면 3일 분량인데 14,000원은 심하다. 안 되겠다. 먼지 쌓인 한국인 김치에게 돌아간다.


30그램에 1파운드(2,000원). 음. 고객 친화적인 가격이다. 상온 보관이라니 분명 진공포장을 잘했을 거야. 중국산 배추지만 그들에게는 국산이지. 자존심이고 뭐고 합리화 대잔치를 열며 어느새 난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냄비에 불을 올리고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라면+김치 최강 조합을 맛보게 되는군. 눈물이 마려워 온다. 오늘인가!


 드드득- , 예상했듯 역시나 한 번에 깔끔히 뜯어지지 않는 한국인 김치는 책상 한가운데에 일 자로 벌건 방울들을 남겼다. 웁스.

괜찮아. 김치국물은 한두 번은 흘려주는 게 인지상정(?). 자 이제 먹어보자.

냠.

음.

음...

짜다.

그냥 짜.


 대륙의 음식이라 소금도 호쾌하게 뿌려 넣은 것인가, 아마 소금에 절인 후 물에 헹구는 것을 잊거나 건너뛴 것 같다.

 

투덜대긴 했지만 그래도 김치는 김치라고 이조차 반가우니 일단은 냠냠한다. 조금 먹고 남길 요량이었으나

짜다고 이게 뭐냐고 한 말 취소. 내 손이 머리와 다르게 행동하는 바람에 실은 순삭 하였다.


 자존심이 구겨진다. 이상한 글씨로 쓰인 한국인 김치에 영혼을 판 것 같아서 찝찝했다. 이 녀석을 계속 사 먹을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BB고 김치느님도 모셔올 수 없는 형편. 이렇게 된 이상, 상온에 놓일 수 없는  제대로 된 김치를 직접 만들어보리라.


 레시피를 찾아보니 기본재료들과 함께 양념용 과일이 필요한데 마침 캠퍼스 내의 작은 텃밭을 갈고 나서 선물로 받은 못난이 사과와, 너무 익어 뭉그러져 가는 배가 있지 않은가!! 좋아. 고춧가루와 액젓, 배추만 있으면 되겠군.


 나는 좀체 나가지 않는 타운까지 나가 한 포기에 6,000원이나 하는 배추, 그리고 생강, 쪽파 등 여타 재료들을 한 무더기 사 들고 돌아왔다. 와, 내가 이 정도까지 김치에 애착을 가지게 될 줄이야. 단연 나는 한국인이었다!


자 그럼 집도를 시작하지.


우선 배추를 잘 씻고, 소금을 뿌려 재워둔다.


소금이 소복하니 쌓인 배추를 보고 있으려니 사뭇 아름답기까지 하다. 마침 햇살까지 적절하게 내리쬐었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 휘적휘적 한 뒤 숨이 죽게 놔 두어 본다.




쉬운 레시피를 검색했기에, 생각보다 과정은 간단했다. 설탕 없이 사과와 배 만으로 단맛을 낸 양념은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좋았어. 이제 배추가 잘 절여지기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 심심했다. 오픈 채팅방을 열어본다. 이 채팅방은 영국석사 과정 중에 있는 한인들이 모여있는 방인데 이미 졸업한 사람들, 박사 과정 중인 사람들, 그리고 예비 석사생들 500명가량이 모여 유용한 정보들을 주고받는다. 대화가 많아 못 따라잡을 때도 있지만 유학 초반에 많은 도움을 받았었기에 간혹 아는 질문이 올라오면 나도 답변을 하고는 한다. 오래간만에 이런저런 지나간 이야기들을 올려보면서 웃기도 하고,  맞아 나도 초반에 이랬었지 하며 (똑똑. 당신 지금 2주 차입니다) 키득대고 있노라니 어느덧 시간이 후딱 지나있었다. 맞다, 배추 상태 체크해야 하는데? 구부려 보면 얼마나 잘 절여졌는지 알 수 있다고 했으렷다(Thanks to YouTube)??. 슬슬 폰은 내려놓고 다시 신성한 김장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별안간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잠깐.  뭐라고???


"일정 있는 것 빼고 나머지 시간을 다 쓰지 않나요?" - 이거 한국어가 맞나.  

하루에 8-10시간?

하루 12?? 아니, 하루 4시간??

잠시만요.  하루에 4시간을 공부한다고??


헉, 한동안 이 톡 방을 열지 않았었는데 다들 이러고 있었던 것인가?

본디 그랬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우박이나 뭉치고 놀면서 오리 떼 꽁무니를 따라다닐 때 이들은 4~10시간씩 도서관에 출근했다고?



내 모습을 돌아본다.

다른 유학생들 저렇게 죽을 듯 공부하는 동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아니고 기숙사 부엌 냉장고에 기대서서 배추가 숨이 죽었는지나 구부려 보고 있는 나는 뭐지...


심지어 그 와중에 제대로 허리 굽힌 배추에 안도한 나는 또 뭐지…



아,

강하고 세게 현자 타임이 올 뻔했지만

석사 유학은 분명 장기 마라톤이다.  멀리 보아야 할 터다.  


 삶에서 먹는 일이 얼마나 중한데

음식에 적응 못해 이곳의 삶이 싫어져 버리면 훗날 어느 순간 공부를 놓아 버리게 될지 어찌 아는가?

부끄럽지만 나는 오늘 난생처음으로 김치를 담가 보았다.

무엇이라도 배움이 있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나는 나만의 속도가 있을 것이다. 각자의 배움은 각자의 비워진 칸에 들어갈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삶의 어느 한 칸을 또 이렇듯 메꾸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생각인지 생강인지

상념인지 양념인지

뭐라도 상관없이 조물 조물 버무리다 보니 어느새 김치는 완성되었다.




본디는 접시들이나 대충 쌓여있을 투박한 회색 대야에서

달고, 시원하고, 아삭한 무언가, 어쩌면 내가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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