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모르는 이와 손 붙잡고 울 줄이야
토요일 아침. 창문을 기분 좋게 열어보지만 늘 그렇듯 흐린 날씨에 몸까지 찌뿌둥하다. 이런 날은 좀체 이불밖을 나서지 않는 주의지만 오늘은 꼼짝없이 시내엘 가야 한다. 주말에 장을 보지 않으면 평일엔 캠퍼스 내의 비싼(!) 슈퍼에서 눈물 젖은 재료를 사야 하기에.
으, 번거롭지만 억지로 스웨터를 껴 입고 시내로 나서 2주 치 먹거리를 잔뜩 골라 담았다. 주스며 올리브 오일 같은 무거운 유리병들에 더해 김치재료까지 사서 백팩은 가득 찼고, 두 손에도 묵직한 장 본 것들이 들렸다. 평소라면 오랜만에 나왔으니 시내 구경도 하고, 채러티 숍에 들러 빈티지 옷도 뒤적여 보겠지만, 짐이 많은 날은 본디 뭐 하나 하는 게 다 번거롭기 마련이다. 일찌감치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향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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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저으기 어디쯤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 걸까?? 마음이 잠깐 흔들리지만 현재 장바구니를 두 개나 들고 있는 나에게 음악은 사치인 듯도...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아니, 그런데 이거 음원을 튼 게 아니라 뭔가 라이브 같은 느낌인데...
그래, 명색이 주말 시내 나들이인데, 라이브 귀동냥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며 소리가 나는 골목으로 천천히 걸었다.
소리가 나는 곳에 멈춰 서 보니 아, 한 카페의 2층에서 어떤 여자분이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거리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파워풀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음색에 그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까지 호소력이 있을 수가 있을까.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이 거리 전체가 그녀라는 색으로 전부 덮여 버린 듯 가득 칠해졌다.
"너무 멋지지 않아? (It's Amaizing, Isn't it!-편의를 위해 이후로는 한국어로 번역하여 적는다)"
누군가 대뜸 건넨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처럼 이 노래를 듣고 가던 길에 멈춰 선 한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그러니까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나도, 지금 이 소리에 이끌려 왔어. 친구랑 같이 걷다 말고 멈춰 섰지 뭐야"
"하하하, 저도 그래요. 도저히 이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친구분은 어디...?"
"친구는 앞서서 가버렸어. 내가 멈춰 선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아. 조만간 연락이 오겠지 뭐. 하하하"
"아, 그렇구나"
친구를 따라 금방 자리를 뜰 것 같던 그녀는 계속 나와 함께 그 자리에 서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곡이 두 번째로 넘어가니 아, 이건 금방 끝날 감상이 아니었다. 몇 곡은 더 들어야 하겠다. 슬슬 내가 가진 짐의 무게도 다시금 느껴져 오는데, 다리도 아파와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작은 벤치가 보였다.
"저희, 여기 앉아서 들을까요??" 조심스레 아주머니께 청했다.
"아, 좋지 "
음악은 길거리에서 마주친, 생판 모르는 이 두 사람을 한 자리에 앉혀 놓았다.
우리는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다가, 간혹 2층 창문 조그마한 네모 사이로 보이는 노래하는 그녀와 가끔 눈을 맞추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간혹 우리 쪽을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노래는 어느새 'My way'로 바뀌고 있었다.
이 거리, 이 공간과 공기, 음악, 함께 앉은자리... 여기 오길 잘했다. 오늘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를 잘했다. 장을 보고 나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음악을 좇기를 잘했다.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이 순간이 너무 충만했다. 뭔가 모를 감동과 벅참이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을 모르는 이에게 내보이기는 어딘가 부끄러워 꾹꾹 눌렀다. 그러나 내 의지로 눌러질 것이 애초에 아니었던지, 아니면 안과 밖으로 감동치가 한도초과였는지 눈물이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아..."
아주머니를 흘끗 보니, 그녀도 눈물을 가득 흘리고 계셨다.
"정말, 이 순간이 너무 감동적인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제 말이요... 아니 지금 우는 거 너무 이상한데, 그런데..."
"나도, 지금 모르는 사람 붙잡고 뭐 하는 거래 우리?"
알고 보니, 모르는 새 우리는 둘 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로 한 손을 꼭 부여잡고 이 순간을 공명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음악이라는 게 너무 놀라워. 목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우리는 그것에 이끌려 이렇게 와 있고... 이 시간, 공간, 소리 모든 것에 너무 감사하게 돼. 그저 감동적이야. "
아, 내가 느끼고 있는 바로 그걸 이 분도 똑같이 느끼고 있구나. 이런 걸 동기화 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우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저는 시호라고 해요. 여기 유학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랑 앉아서 음악을 듣는 건 처음이에요"
울다가 멈추고 웃고, 웃다가 멈추고 울다가 하면서 떠듬떠듬 말하는 나는 분명 이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로즈라고 해. 나도 이 순간이 너무 신기해. 아니, 이 순간을 우리만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신기해. 주변을 한번 봐봐"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별 감흥이 없이 이 자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더러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 대기도 하고 사진도 찍지만 잠시 뿐, 이 자리에 그리 오래 머무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그러네요. 이 순간을 충만하게 즐기는 건 지금 우리뿐인 것 같아요"
"너무 신기해. 나는 이런 시간이 너무 필요했나 봐. 잠시 멈춰 서서, 그 순간을 만끽하고 충만해하는 그런 시간 말이야"
"저도 그래요. 그냥 지금 현재에 이 순간에 그저 멈춰서 집중하고, 누군가와 감정으로 연결되는 이 시간이 저도 너무 감사한 것 같아요. 그냥 다 감사해요"
"내가 감사해. 지금 이 순간에 함께 해줘서 내가 고마워, 시호"
(젠장. 더 좋은 말로 이 감동과 감사를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는데 나의 짧은 영어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일부터 정말 영어 공부 제대로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는 순간이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계속 울었다.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울기도 하잖은가, 나는 지금 너무 충만하게 행복한 중이었다. 그녀와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민망해하다가 또 웃다가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짝짝짝 짝짝-
카페 2층에서 박수갈채가 들린다. 한 곡이 또 끝난 것 같다. 우리도 벤치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며 또 한 번 웃어 주었다. 옆자리의 로즈 아주머니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한참 이 상황을 신나서 설명하신다.
"그렇다니까, 아까 그 자리야. 음악이 좋아서 멈춰 섰다가 진짜 멋진 아가씨를 만났지 뭐야. 그리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울컥하질 않나.. 내 말이. 모르는 사람 둘이 벤치에 앉아서 줄줄 울고 있고, 감동하고 있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해줄게. 우선 쉬고 있어!"
전화를 마친 그녀는 이 신나는 경험을 전할 생각에 아까보다 더 신나신 듯 보였다.
"내 친구는 호텔로 가서 뻗었대. 날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아, 정말 행복했다. 그렇지 시호? "
"저도요. 집에 가야 하는데 굳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하길 너무 잘했어요"
"나도. 멈춰 서길 너무 잘했어. 이 시간을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학교 생활도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
"감사해요. 로즈도 늘 행복하세요"
눈물을 훔치고 이제 돌아서려는데 그다음 노래가 시작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동시에 2층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하하하. 우리가 팬이 돼 버린 걸 알아챈 것 같아요"
"그러게"
그 짧은 순간 로즈와 나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
"정말?(Really?)"
"그럴까? (Shall we?)"
"그래버릴까요?(Really?)"
"안될게 뭐람!(Why Not!)"
다음 순간, 우리는 깔깔대며 2층 카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노래하는 그녀는 우리를 눈웃음으로 반가이 맞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나는 소이 더티 라테를 시켰다. "시호, 혹시 너도 우유를 안 먹니?"
"네, 유제품은 되도록 안 먹으려고 해요"
"이럴 수가, 나도 비건이야!"
이걸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함께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을 확률은? 손을 꼭 붙들고 서로의 눈물과 감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확률은? 그리고 그 사람과, 갑자기 카페에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실 확률은? 그리고 그 사람이 비건일 확률은 대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나만큼이나 명상과 영적인 수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주파수가 이 음악을 통해 이 시간과 공간을 관통해 우리를 이어준 거겠지.
더 가까이서 보고 들으니 감동과 감흥이 네 배는 족히 오른 것 같다. 로즈가 아까 한 말이 계속 맴돈다.
'Seize the moment"
순간을 소중히 하자는 이 말이 아마도 오늘부로 나의 유학생활의 모토가 되어버린 듯싶다. 순간에 충실하고, 순간에 감사한 덕에 나는 오늘 영국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그것도 비건인 친구가 생겼다. 그것도 길 위에서!
우리가 이 인연과 운명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노래하던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결국 올라와 주었군요! 너무 고마워요. 저는 Beny라고 해요"
"반가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올라오게 되었는지 알아? 우리, 실은 모르는 사이야"
"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흥분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전했다. 함께 길거리에 멈춰 선 그 순간, 그리고 벤치에 같이 앉아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현재에 감사했던 이야기. 이 모든 게 음악이 우리를 엮어준 거다. 너의 노래의 힘이다라고까지.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코가 점차 빨개지더니 눈에 눈물이 맺힌다.
"정말인가요, 제 노래를 듣고 그렇게나 행복했단 말이죠. 이럴 수가! 이젠 제가 너무 행복해요. 너무 감사해요!" 그녀도 이제 줄줄 울고 있었다.
"저는 여기 전속 가수가 아니에요. 이 지역 저 지역으로 거리를 전전하는 버스커인데, 얼마 전에 이곳에서 버스킹을 하다가 이 카페 사장님 눈에 띄어서 오늘 하루 공연을 해 드리기로 했어요"
"와, 정말 멋진 일이네요!!"
"당신 실력은 거리에만 있기에는 아깝죠!!"
"언젠가는, 이런 따뜻한 실내에서 계속 고정으로 노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버스커에게 겨울은 너무 춥거든요..."
"꼭, 이루어질 거예요. 반드시"
"그럼요"
이제 손을 꼭 맞잡고 눈물을 흘리는 멤버는 세 명이 되었다. 어느새 함께 자리한 우리는 서로의 현재와 비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응원을 나누고 있었다.
"여기,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나 행복한 기운이라니??"
과한 행복으로 아드레날린이 넘쳐흐른 탓이었을까, 옆 테이블에서, 앞테이블에서 우리에게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러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신나서 오늘의 스토리를 영웅담 마냥 읊어주었다. 화자가 늘어났다.
"무슨 일들이에요?"
떠들썩한 인파를 제치며 조금 다른 기류의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 카페의 여사장님이었다.
"아, 저희가 Beny(버스커)의 노래를 듣다가요...~~~"
이제 몇 명한테 이야기했는지도 모를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해프닝을 다 듣더니 사장님이 말했다.
"오, 정말인가요? 너무나 감동적이에요!"
"네, 오늘 베니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거예요. 베니를 오늘 이 자리에서 노래하게 한 건 너무 아름다운 일이에요, 사장님"
우리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사장에게 베니를 추천했다.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다 들은 손님들도 하나가 되어 동조했다.
"우리도 베니의 노래를 듣고 여기에 온 걸요!"
"그럼요!"
이야기를 다 듣던 사장님도 어느새 감동을 받고 계신지 손이 약하게 떨리고 계셨다. 그리고 예상했듯 안경 아래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좋아요!! 결정했어요. 오늘부로 베니는 우리 카페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노래를 하게 될 거예요!"
"악!!!!! 뭐라고요?? 사장님 정말인가요?"
베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방방 뛰었다.
"정말이에요. 이런 행복한 바이러스가 카페에 가득한데, 어떻게 안 그래요? 그게 더 이상하죠! 매니저, 계약서 하나 만들자!"
이제 카페 2층은 박수갈채와 눈물, 그리고 환호로 가득 찼다. 우리 셋은, 아니 넷은, 아니 다섯, 여섯, 열 명도 넘게는 이제 다 같이 BENY! BENY! 를 외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얼굴이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베니를 우리는 힘차게 안아주었다.
"다, 잘될 거야! 우리 아까 서로에게 그런 기운을 보냈잖아!"
"맞아, 다 운명이라니깐?"
베니는 아직도 얼떨떨한지 눈물이며 콧물이며를 세차게 풀어내며 핸드백을 뒤져 뭔가를 찾아냈다.
"시호, 그리고 로즈. 내 명함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알아?"
다시 울먹거리며 베니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마인드가 전부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쓰여있었다.
베니의 신념은 옳았다. 그리고 본인을 믿고 진심으로 노래했기에 우리를 끌어당겼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을, 그리고 사장을, 기회를 끌어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또 있을까?
특별한, 그리고 여전히 나도 얼떨떨한, 영화 같은 그런 하루.
한 명도 너무 감사한데, 나는 갑자기 엄청난 두 명의 친구가 생겨버렸다.
월요일이 되면, 앞으로 조금 더 단단하게, 의심 없이 현재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Seize the moment"
이러려고 난 이곳에 온 거구나.
이 일은 랭커스터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