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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ho Dec 29. 2024

런던과 날숨, 그리고 낙엽

플러스, 마이너스 2배 속의 삶

"시호야. 이 잎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 알아?"

"엄마, 쪼옴- 그냥 걷자. 숲 해설 하지 말고"


본가가 도봉산,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입지에 있는 데다 어머니가 숲치유와 관련된 일을 하시다 보니, 엄마와의 산책은 늘 숲치유 내지는 숲해설 워크숍으로 변질(?)하곤 했다. 지인들은 그런 순수한 영혼을 가진 어머니를 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며 부러워했지만 나는 어머니가 움트는 싹눈의 귀여움, 그리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의 기개에 탄복하기보다 내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 주길 바란 것도 같다.

 이야기를 잘하고 있다가도 "어머, 저거봐! 저기 새 보이니?" "어머, 얘 벌써 올라온다. 이거 봐봐" 하면서 맥이 끊겨 버리는 바람에 김이 샌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참 그놈의 새 순인지 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면 내가 하던 이야기는 버얼써 흩어져서 산새 모이로나 쓰이는지 마는지... 나는 괜스레 그런 것들이 미웠다. '쳇. 새순이야 뭐 매 해 새로 나는 건데.'


소위 환경과 관련된 예술을 하며 동물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식물에 대해선 다소 냉담했던 건 그 이유라고 변명할 수 있겠다.


상황과 환경의 변화는 사람의 이러한 취향까지도 변하게 하는 것일까?  랭커스터에 도착한 나는 사뭇 달라졌다.

캠퍼스에 즐비한 개암(헤이즐넛) 나무, 단풍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이 떨군 잎사귀들이 그렇게 예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다 각자가 다른 모양, 색, 두께, 질감, 크기 인지. 하나하나 걸음마다 줍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수업을 갈 때마다 땅만 보고 걷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노라면 마음에 드는 이파리 하나 둘, 셋, 넷쯤은 꼭 가지고 강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호! 너 낙엽을 굉장히 좋아하나 봐!"


동기 Freya가 내 손에 들린 낙엽을 보더니 외쳤다.


아닌데. 나 딱히는...


"너 매 강의 시간마다 낙엽을 들고 오는 걸, 그건 좋아하는 거잖아"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낙엽에 꽤나 빠져있었다. 방에 두었더니 너무 건조한 나머지 다음날 오징어 구이처럼 돌돌 말려져 바스러지는 아픔을 겪고 나서는 두꺼운 책에 차곡차곡 끼워두고 있다. (원래 두꺼운 책의 용도란 그런 것 아닌가. 냄비 받침으로 쓸 때보다는 한결 낭만적이고...)


게다가 노트북 데코가 따로 필요 없다. 매번 예쁜 낙엽들을 주워다가 케이스에 얹어 끼우면 차가운 기계 위에 그 자체로 가을 감성이 가득한 케이스가 되니까.


전공과목의 과제물 중에 수업을 들은 날의 영감/ 느낀 점 등을 기록하는 LOG BOOK 이란 것이 있는데, 나는 그날의 기분 혹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낙엽을 주워 끼워두며 이 일기장을 써 나가고 있다. 할머니 손이 떠오르는 낙엽, 추적추적 싫은데도 자꾸 신발에 붙어 따라오는 누구 같은 낙엽, 그 빛깔이 너무 고혹적이라서 말라가는 걸 바라보기도 안타까운 낙엽... 이렇게 한번 더 이들을 돌아보게 되니 참 아름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자꾸 밀리게 되는 건 안 비밀...)




YOUR TRIP TO LONDON Tomorrow!

  진작부터 끊어두었던 런던행 기차가 내일 정시에 출발한다고, 잊지 말라는 알람이 왔다.

랭커스터에 와서 두 번째 런던행이다. 첫 번째는 한국에서 입국할 때 런던을 통했고, 이번이 [짐 없이 가는] 처음 런던행이 될 것이다. 두근두근, 감사하게도 런던에 자취하고 있는 지인이 있는 덕에 그 비싼 런던의 숙박비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런던을 찍고 오리라 다짐했었지만 유학생의 본분을 다 하다 보면 그것은 뭘 모르던 때의 치기에 지나지 않는 생각이었고.


런던에서의 이 틀 째. 창문을 화알짝 열고 아침의 그 상쾌한 공기- 를 들어마시려는데 아침부터 아래층에서 누가 대마를 태우시는지 그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이고. 닫자. 모닝 기분을 살짝 잡친 나는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이 동네를 벗어나기로 한다. 오늘은 애정하는 백현진 작가+배우+가수 님의 공연이 있다고 해서 진작부터 티켓을 예매해 두고 들뜬 중이다. 뮤지컬 해밀튼과 백현진 콘서트 중에 고민했지만... 해밀튼은 또 볼 수 있고, 백 작가님 공연은 한국에서도 보기가 조금 어려운지라. 오래 고민할 필욘 없었다.


거리로 나섰지만 여전히 들 숨은 어려웠다.

예의 그 부옇고 큼큼한 연초 담배의 연기, 그리고 인위적으로 들큼한 전자 담배의 냄새들이 길거리 구석구석의 오줌냄새와 뒤섞여 아찔했다. 그렇기만 하면 그냥 숨을 참고 있을 텐데 한 블록에 하나씩은 꼭 있는 카페를 지날 때마다 풍겨 나오는 갓 구운 빵, 로스팅한 커피 향기들이 자꾸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싶게 했다. 정말이지 이건 고문도 아니고 퍽 괴로웠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젓다가 거리의 가로수를 발견했다. (의도한 라임 아님)

오, 그렇지. 런던은 의외로 나무가 많았지.

거리에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울창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와중에 나의 시선은 또 그 아래로 꽂혔다. 큼지막한 낙엽들이 잔뜩 뒹굴고 있다. 캠퍼스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양과 크기들이다.


좋다. 앞으로 3일은 더 런던에 있을 테니 오가며 낙엽을 주워 노트북 케이스도 '런던 리미티드 에디션 F/W'로 리뉴얼하기로 한다. 키득거리며 오전 일정인 Christmas Fair로 향했다. 아직 11월인데 벌써 이들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하다. 크리스마스 덕후인 나는 덩달아 신났고.


페어는 입장료부터 30파운드(거의 6만 원)에 육박했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주거나 하지도 않는데 꽤나 비싼 편이다. 그래도 넓디넓은, 3층에 달하는 전시장을 꽉 채운 상점들, 먹거리들이 있어 꽤나 즐겁게 구경했다. 나이가 드니까 이제 물건에 대한 욕심도 줄어드는지 예전보다 살 것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스카프도 많고, 카드.. 는 사봤자 보낼 곳도 많지 않고 자원낭비인 데다, 디저트... 다 설탕이지 무어. 와! 귀엽다! 하는 것들은 정말 많았지만 그 귀여움이 곧 다른 귀여운 물건으로 대체되면서 아기자기한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지 않는가? 자제.



나는 Intelligent Change라는 회사에서 나온 다소 생경한 방식의 다이어리만 두 권 샀다. 하나는 Productivity Planner, 또 하나는 Becomimg a warrior Journal인데 전자는 한주의 스케줄을 중요한 것, 차 순위로 중요한 것, 옵셔널로 나누어 적고 그날그날의 배운 점, 하이라이트, 오늘의 일과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적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돌아보게 만드는 다이어리이다. 돌아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에게 딱이다. 워리어 저널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게 하는 형식의 노트였는데 완전 처음 보는 방식에 그만 반해버렸다.


무슨 다이어리가 한 권에 4-5만 원씩이나 하긴 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이 두권만 나는 사들고 나왔다. 크리스마스 쿠키도, 귀여운 인형도 좋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조금 더 생산적인 지출을 한 나에게 스스로 뿌듯하고 기특한 맘에 진저브레드 쿠키를 사 먹었다. (??)


콘서트, 즐거웠다. 괜히 백현진 작가님이 아니시죠. 천재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저렇게 다 잘해. 불공평해. 그리고 이제는 저 높은 곳에 있을 나의 친척오빠 방준석을 생각하며 그가 만든 곡을 들을 때는 눈물도 참기 힘들었다. 휴.


그간 먹어 볼 수 없었던 한국형 치킨도 먹어보고, OSEYO라는 한국마트에 가서 라면도 몇 개 사고 (랭커스터는 한인마트가 없음), 불닭소스도 사고 이래저래 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갔다. 런던에 장을 보러 오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그 이후에도 갤러리, 연주회, 테이트 모던, 릴스용 영상 촬영, 충전, 커피... 나의 나흘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담배연기와 거리 행사, 화려한 크리스마스 조명들과 2층버스의 빵빵 대는 소리, 눈에 때려 박는 뮤지컬 광고들, 배달 가는 오토바이와 우버, 수많은 관광객들의 슈트케이스 끄는 들들들들들들들 소리, 중국어, 불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 중국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허덕허덕 랭커스터행 기차에 올라 있었다. 아. 드디어 가는구나. 짧지만 길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2시간 반동안 이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기절했다. 꽤나 고단했던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송이 나와 흠칫 놀라 일어나니 어느새 랭커스터. 테이블에 올려두고 전원조차 켜지 않은 노트북을 황급하게 접어 가방에 넣고 나는 폴짝 내린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콧속으로 쏴아아아 밀려들어오는,

다소 과장해 애플 민트 같은 청량감 넘치는 공기가 내 뒤통수 끝에서 휘구루루루루하고 돈다.

살 것 같다. 숨 쉴 수 있는 것 같다.


하아아아아

하아아아아


마치 오랜 시간 한 번도 숨 쉬어 본 적 없는, 마스크를 10년은 하고 살다 이제야 처음 떼어낸 듯 나는 갈망하던 공기를 사치스럽게 들이마셔 댔다.


런던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숨 쉬어 본 일이 없었다.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이 컸던 거겠지. 그렇게나 런던을 사랑하던 내가 이틀 째부터 '빨리 랭커스터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느낄 때부터 아차 싶었다. 시골에 적응해 버린 것 같아서. 그런데 뭐 아무렴 어때.


버스로 갈아타고 학교에 내려 가방을 끌고 가는데 낙엽에 시선이 꽂혔다.


응? 낙엽. 아? 낙엽!!!


그러고 보니까 런던에서 낙엽을 줍는 것을 깜박했다. 아니, 3박 4일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잎사귀 하나를 못 주웠다고? 이 멍청한 녀석아 하고 또 습관처럼 스스로를 탓하려다가 잠깐 멈췄다.

왜지? 분명히 첫날 낙엽을 보고 다짐까지 했는데. 시간도 많았는데, 많은 시간을 주체 못 해서 카페에 가서 시간 죽이기도 했는데 왜 나는 낙엽을 줍지 못했을까? 왜 놓쳤을까?


 천천한 속도로, 그립던 낙엽들과 다시 눈을 맞추어 걸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이 그럴 새가 없었다.

거리에 누운 잎들에게 다가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곳의 속도는 마치 2배 속, 걷다가 멈추면 바쁜 보폭으로 걷던 뒷사람이 나에게 부딪힐 터다.


늘 어디론가 향했다. 목적했고, 도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과 도달 사이에 놓인 이 녀석들에게는

눈도 마음도 주지 못했던 거였다.


여기는 뭐가 다른가?

목적과 도달이, 뒤에서 걷는 사람이, 시계를 보며 뛰는 사람이 없다. 아니, 남들보다도 내 마음과 정신이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내가 런던에 있을 때 몸은 그곳에 있으나 분명히 정신은 없었다. 늘 정신없이 걸었다.


삶의 속도. 그리고 다시 찾은 정신. 내가 역에 내려서 크게 쉬었던 들 숨.


그것이 내가 이곳 랭커스터에 있는 이유였다.

내가 한 선택에 괜 시 흐뭇했다.


멀찌기, 비 맞은 우체통 위에 떨어져 있는 멋진 자세의 낙엽 하나가 보인다.

살포시 주워 들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을 잊지 말아야겠다.


D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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