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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ho Dec 08. 2024

어휘가 없네

할 말 안 할 말 게다가 못할 말  

나는 영어점수가 부족한 와중에 무작정 여섯 학교에 서류를 들이밀었다. 토플은 망했지만 얼마 전 봐둔 아이엘츠점수가 그. 나. 마 봐줄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조건부 입학]이라고 해서, 합격 요건도 되고 면접도 통과했는데 영어점수'만' 부족한 경우 랭귀지 코스를 수료하면 입학을 허락하는 제도가 있기에 정 안되면 그거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생각보다 서류 전형은 빠르게 지나갔고

Gold Smith University of London - Art & Ecology

Lancaster University - Theatre for Social, olitical, and Environmental change (길다)

Trinity College - Theatre and Performance(는 아일랜드에 있음)

이 세 학교에서 면접 요청이 왔다. (다른 세 군데는 면접이 없었다)


랭커스터: 골드스미스에서 강의를 하다가 랭커스터로 넘어온 교수님이라 이 분에게 관심이 많이 갔다. 가장 처음 본 면접이라 엄청 긴장했는데 시종일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질문을 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왜 바다오염에 관심이 많은지, 왜 고래에 꽂혀있는지 이야기하다가 또 울컥해버렸다. 면접 보다가 우는 사람 나 말고 또 있나...? 몹시 민망했는데 교수님은 괜찮다며 네가 그만큼 진심인 걸 알겠다고 끄덕이셨다.


트리니티: 아일랜드의 서울대 트리니티... 그냥 도서관에 반해 지원했는데, 교수님의 질문들도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었는가 와는 별개로) 수준이 높아 역시구나 했다. 마지막으로 학과에 질문이 없냐고 해서 '커리큘럼에 셰익스피어를 배우는 과목이 있던데, 더 중요한 난제들이 세상에서 쏟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계속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가 있는가요?'라는 당돌한 질문을 해 버렸다. 망할 조짐이 왔지만 궁금한데 어떡해. 교수님은 '너, 근데 내 연구가 전적으로 셰익스피어 고전문학인 것은 알고 말하는 거지?' 라며 빙긋 웃으시고는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먼저 공부할 거다. 그러고 나서 너 하고 싶은 공부에 이용하든, 차용하든, 영감을 받든 하길 바란다’며 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어주셨다. 일견 자애롭지만 나의 먼 앞길에 다소 이르다 싶은 응원을 보내주시는 모습을 보며 느꼈다. 진정 망했구나...


골드스미스: 두 교수님에게 면접을 보았는데, 포트폴리오를 설명하는 동안 매의 눈으로 나를 관찰하시는 남자교수님의 눈빛에 어버버버 하다가 시간이 다 가버렸다. 학교의 명성답게 15분 단위로 하루 종일 잡힌 면접일정에 교수님들도 맘이 급한지 질문이 쉼표 없이 몰아쳤다. 내가 작가로서 작업을 영어로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잘 훈련되어 있지 못함을 반성했다.


 면접들이 끝났다. 당락과는 상관없이 과정을 무사히 끝낸 나에게 괜 시 뿌듯했다. 느낀 것도 많았다. 아직 나는 갈 길이 멀구나. 그래서 더 배워야 하는구나. 들뜨기만 했던 마음이 차분하고 겸허해졌다.  


 감사하게도 여섯 군데 중 다섯 군데가 합격 메일을 보내왔다. 물론 '너 학교 입학 전까지 영어점수 더 올려야 해. 알지?'의 조건을 담아.  오래간만에 추억여행도 할 겸 메일함에 가서 꺼내와 본다. (개인정보는 지웠다)




다시 보니 요크 대학교 로고 멋지다. 골드스미스는 무심한 듯 심플한 것이 과연 실리적 교육기관이다. 우리 학교 갑자기 로고 좀 촌스럽게 느껴진다. 합격한 다른 두 학교는 그냥 올리지 않기로 한다. 오래 고민한 세 학교에 들어가지 않는 곳들이라 굳이.


지속가능한 환경교육과 커뮤니케이션, 에콜로지와 예술, 사회/정치/환경변화를 위한 공연예술로 각 전공도 각기 다르다. 때문에 자기소개서와 이력도 다 다르게 준비하느라 조금 힘들었다. 보통은 이렇게 안 한다던데 ㅎㅎ 무식한 놈이 용감한 법.




이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아이엘츠 공부를 다시 시작하거나, 랭귀지 코스를 듣거나.

금액을 확인했다. 2주에 파, 팔백만 원??? 안 되겠다. 오늘부터 다시 공부다!

엄청난 동기가 부여되니 토플때와는 집중도가 달랐다. 한 시간 공부하고 두 시간 요리하고 세 시간 쉬던 토플 시험 준비기간과는 밀도가 다를 수밖에. 암 달라야지.


이후는 10배 빨리 감기. 나는 결국 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넘길 수 있었다. 야호!!!! 800만 원이 굳었다!

기분이다! 그날 저녁은 마라탕에 뉴진면+아이스티까지 당당히 추가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 빅터프랭클(Viktor Frankl)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학교들을 지원했다 보니 합격한 뒤엔 의외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골드스미스? 좋지. 런던에 사는 건 늘 나의 꿈 아니었나. 그런데 런던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삶의 질은 어마어마하게 떨어진다고. 흡사 서울보다 더 하다고. 월세가 250만 원?? 아니 그렇게까지? 그리고 학교의 특성상 골드스미스는 아무래도 아티스트를 키우는 곳이다 보니 훈련이 힘든 편. 교수님께 메일을 드려서 미리 읽어보고 가야 할 논문이 있는지 알려주십사 했는데 무려 80개의 논문리스트를 보내오셨다... 죄송해요. 너무 감사한데 너무 죄송해요. 조금, 자신이 없어졌어요.


트리니티는 마음속 1순위의 학교였는데 올해 유달리 지원률이 높았다고. 나는 예비자 명단에 있었고 희망의 끈을 (랭커스터에 입학금을 보내기 바로 전날까지) 놓지 않았으나 끝내 예비자는 한 명도 줄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서울대가 괜히 서울대인가.


 내 글의 여기저기에 힌트가 널려있듯, 결국 나는 랭커스터(Lancaster)라는 듣도 보도 못한 도시를 선택했다. 정말 자그마한, 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그런 곳인데 그럼에도 City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반토막 상식*

영국은 도시(City)와 마을(Town)을 대성당(Cathedral)의 유무로 구별하는데, 이 대성당은 각 교구를 관장하는 주교가 상주한 성당을 말한다. 일례로 본머스(Bournemouth)는 인구수가 26만 명이나 되는데도 대성당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을이고, 랭커스터는 인구수 14만의 작은 동네지만 도시인 것이다!


한때는 런던과 브로드웨이, 화려한 쇼 비즈니스 세계를 갈망했었던 내가 결국 도착한 종착지 랭커스터 대학은 바로 이런 곳이다. (*갑작스러운 장르변화 주의*)



아침 수업으로 향하는 이른 발걸음, 크게 들 숨을 마셨을 적에

코끝이 저릿저릿하면서 뒤통수 저 깊은 곳까지 청량한 파도가 들이치는 기분. 그만큼이나 깨끗한 공기.


울듯한 노랑, 불긋한 자주, 청청한 녹색의 잎사귀 같은, 저마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가며 소리 내는 모든 것들.


그리고

파랗게 차가운 빛을 뿜거나, 지평선을 삼키듯 시뻘겋게 타오르거나, 때로는 그 모든 색을 품고 끝에서 끝까지 펼쳐지는 하늘을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서 바라볼 여유.


그런 것들이 다 이곳 랭커스터엔 있었다.  

다만 설명할 마땅한 어휘가 다소 부족하다.


나의 짧은 글 실력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곳에 와서부터 계속해서 마주하고 겪는 어떠한 현상? 감정? 혹은 뭉근하고 아련한 어떠한 것들은 무슨 말로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야말로 어휘가 없다.


.

.

.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긴 해도 어찌 이런 마법 같은 날들만 있었으랴. 다소 현실적인, 또 다른 어휘 없던 순간을 도망치듯 적는다.




선택과목인 '환경위기와 사회변화(Environmental Crises and Societal Change)'의 첫 강의 날이었다.


  첫 수업이라 십 오분이나 일찍 나가 앉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내용을 다 내 머릿속에 때려 박겠다!라는 각오로 각이 빡 잡힌 채로 수업을 듣는데,

???

]#@#$

@#$@$????


수업의 30% 정도 밖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올로피지컬이 뭐야... 앤솔로지는 뭐야. 교수가 한 문장을 뱉기가 무섭게 나는 웹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안되는데, 강의랑 내가 시간차가 너무 나는데?

정신이 얼얼했다.


"Anthropocene의 뜻을 아는 사람?"


'앤쓰로...? 뭐라는 거야... 저거 단어 맞아?...'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을 간신히 떨치고 웹 사전에 단어를 쳐 보았다.

인류세?

아니, 내가 인류세가 영어로 뭔지를 몰랐다고???

부끄럽다.

세상 부끄러웠다.

그 정도는 알았어야 하지 않나. 그래도 환경예술이니 뭐니 한다는 작자가...


'짐 쌀까'

'짐 싸야 되나'

'다시 ABC부터...'


수업은 우야무야 끝났다.

한쪽 눈썹을 찡 긋^ 올리며 "How was your first class, Are you OK?"라고 물으며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는 카를로스 교수에게 "아뇨. 저 현타 온 듯"이라고 말할 용기도, 실력도 나는 못 됐다.


분명 수업에 갈 때의 발걸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가벼웠는데 기숙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도무지 내 것 같지 않았다. 어이가, 아니 진짜로 어휘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하루 만에 이렇게 강하게 때려 맞을 줄이야. 인류세... 인류세를 몰랐다고.

중얼중얼 거리며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우선 저녁을 차려 한 술 떴다. 뭔가 뱃속에 집에 넣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도무지 무슨 관계인지).


뱃속이 따듯하다. 눈을 깜박깜박. 집중해 보자.

아직 얼얼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집중해 보자.


아마 예전의 (그러니까 젊은 날의) 나라면 이 얼얼함이 그래도 나흘 정도는 갔을 것 같지만 이제 어느 정도 숙성된 연식의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 얼얼이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9개월 만에 논문까지 써서 통과해야 석사 졸업장을 쥘 수 있다.

어쩌라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다 알아들을 순 없다. 그러면 나는 박시호가 아니라 박 파파고겠지.

내 영어실력 알고 뽑았잖아? 그리고 너희, 등록금도 EU학생의 두 배나 받잖아? 그럼 사실 내가 너희 학교에 기여도가 더 높은 거 아니야? 쫄지 말자!

시간을 들이는 수 밖엔, 언어엔 왕도라는 건 없다.

결론.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 따라가자. 넘어지긴 싫다. 넘어지면 분명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것 같으니까



이 정도까지 생각이 정리되니 그 이후의 타격감은 견딜 만했다. (견딜 만했다는 것이지, 절대 한 번에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후로도 내가 관심 있는 수업은 참 괜찮았고, 어떤 수업은 너무- 나 힘들었다. 이해도 10%이하였달까. 카를로스는 콜롬비아에서 온 교수라 미국식 영어이기 때문에 그나마 그정도라도 알아들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멀지만 길진 않다.


아직은 적응기니까. 괜찮아. 이렇게 두 달을 버티면 방학이다. 세상에!


우선 내 뱃속은 악명 높은 영국의 음식에 잘 적응했으니

그걸로 (이번 주는) 되었다. 아래는 음식에 너무 과하게 적응한 증거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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