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의 선택이 나의 자유의지의 산물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첫째, 내가 그 선택의 주체여야 한다. 둘째, 나의 선택은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선택이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어 있다면, 이것은 자유의지를 위한 둘째 조건과 충돌한다. 따라서 반자유의지 논증의 선결정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인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자유의지와 다른 의미를 지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말이 단지 ‘내가 하고자 원했던 것을 했다’는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를 의미한다면, 나의 선택이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내 자유의지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지는 여기서 염두에 두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자유의지와 다르다.
다음으로 어떤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주체는 나일 수 있다. … ‘갑이 딸기 우유를 선택했다’는 것은 ‘선택 시점에 갑의 뇌에서 신경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의 이러한 신경 사건이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해보자. 이러한 가정 아래에서도 갑은 그 선택의 주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가정은 선택 시점에 발생한 뇌의 신경 사건으로서 ‘갑이 딸기 우유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반자유의지 논증의 무작위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것만은 … ]
*대상이나 장소 따위를 일정하게 정하지 아니함. ( )
*어떤 것에 의하여 생겨나는 사물이나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일정한 분량을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함. ( )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 ( )
*‘앞선’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섬. ( )
*결론에 앞서 논리의 근거로 어떤 조건이나 전제를 내세움. 또는 그 조건이나 전제. ( )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 ( )
*생각의 시초. 마음의 속. ( )
*‘그것이 없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꾸미거나 뜻을 더함. ( )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
앞에서 논리곱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수학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은 표로 이해한다.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논리곱은 두 조건이 모두 참일/옳을(T) 때, 즉 '충족'될 때 결론이 참이다/옳다(T)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결론이 거짓이라/그르다(F)는 것이다. ‘오른팔 그리고 왼팔을 들어라.’할 때 양 팔 모두를 들었을 때만 옳은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결론이 참이게/옳게(T) 되는 논리합과 비교해서 이해하면 논리곱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오른팔 또는 왼팔을 들어라’할 때, 둘 중에 하나만 들어도 되고, 모두 들어도 된다. 아무 팔도 들지 않으면 이 말에 따르지 않는 것이니 잘못(F)이다.
논리곱의 경우 철수 쌤은 다음과 같이 판정도로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지문에서 ‘임의의 선택이 나의 자유의지의 산물이 되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은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만약 어느 조건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선택이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즉 자유의지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내가 그 선택의 주체여야 한다.’와 ‘둘째, 나의 선택은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두 조건을 다음과 같은 판정도로 이해한다.
철수 쌤은 판정 기준을 긍정문으로 설정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위에서 ‘선결정되어 있는가?’라는 두 번째 판정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그러면 선결정되어 있는가에서 아니오(N)인 경우가 ‘자유의지의 산물임’으로 판정되는 것에 유의하자. ‘아니다’의 ‘예(Y)’는 ‘아니다’이고, ‘아니다’의 ‘아니오(N)’는 ‘예’이다.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의 ‘예(Y)’는 ‘선결정되어 있다’의 ‘아니오(N)’와 같고,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의 ‘아니오(N)’는 ‘선결정되어 있다’의 ‘예(Y)’와 같다.
학생들이 어려워 하는 것은 철수 쌤도 어려워 한다. 철수 쌤도 부정문과 긍정문을 기준으로 판정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철수 쌤은 수많은 훈련을 통해 실수를 줄임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해 왔을 뿐이다.
…면, … 조건과 충돌한다. 따라서 …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재미없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다. 아마 이런 것을 생각하며 글을 읽어야 한다면 많은 학생들이 글 읽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글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언명제(假言命題)라는 것이 있다. ‘A면 B’라는 형식으로 된 명제로서, A는 조건이고 B는 결과이다. 이 명제를 사용해 삼단논법을 하면 가언 삼단논법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지면 타당하다고 한다.
논리학에서는 B를 후건(後件)이라고 하는데 그 용어를 굳이 외우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B가 아니다)함으로써 조건(이를 논리학에서는 전건(前件)이라 하는데, 이 용어 또한 외울 필요가 없다.)을 부정(A가 아니다)하는 형식은 외워 두어야 글 읽기에 도움이 된다. 이에 따라 지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면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라는 대전제는 지문의 ‘둘째’ 조건으로 만든 것이다. ‘선결정되어 있지 않지 않다.’ 즉 ‘선결정되어 있다.’라는 소전제는 ‘반자유의지 논증’에서 말한 전제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후건 부정의 삼단논법에 따라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가 된다.
이는 ‘반자유의지 논증의 … 결론인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 결론은 ‘선결정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선결정 가정’은 ‘선결정되어 있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짐작을 철수 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 있는 후건 부정의 삼단논법을 외워 두었다가 활용해서 글을 읽기 때문이다.(물론 선결정 가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고등학생 수준에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위 지문에는 없지만 원래 지문에는 ‘선결정되어 있다’를 ‘선결정 가정’이라고 했다. 다만 후건 부정의 삼단논법은 알아 두길 권한다. 이는 중요한 국어 능력이다.)
여기까지 철수 쌤이 이해했기 때문에 ‘반자유의지 논증의 선결정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선택이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어 있다면, 이것은 자유의지를 위한 둘째 조건과 충돌한다.’고 했다. ‘선결정되어 있다’와 ‘둘째 조건’인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모순이다. 앞에서 설명한 모순을 잘 이해하고 있는 학생이라면 ‘충돌’이라는 말을 모순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 후건 부정의 삼단논법(결과를 부정함으로써 조건을 부정하는 삼단논법)은 타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반자유의지 논증이 형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형식(규칙)을 잘 지키면 연역법은 타당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지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결정 가정을 고려했을 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반자유의지 논증은 타당한 것이다. 그래서 지문에서는 반자유의지 논증의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지와 다른 의미를 지닌 자유의지
<철수 쌤의 슬기로운 국어공부I>에서 동음이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같은 소리이지만 뜻이 다른 어휘를 구별하는 것은 훈련을 아끼지 말아야 할 국어 능력이다. 일상어뿐만 아니라 개념에도 동음이의가 있을 수 있다. ‘자유의지’는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지와 다른 의미를 지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한다. 소리가 같은데 정의가 다른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문에서 동음이의의 자유의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철수 쌤의 슬기로운 국어공부III>에서 설명한 외연과 내포, 의미자질, 분류 등을 활용해야 한다. 지문에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자유의지’라고 했다. 꾸미는 말은 꾸밈을 받는 말을 한정(제한)한다고 했다. 이를 고려해 철수 쌤은 다음과 같은 계층 구조와 벤다이어그램을 떠올리며 글을 읽는다.
‘남자’와 ‘여자’의 판정은 성(性)에 의해 이루어지지 머리의 길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머리가 길든 짧든 여자는 여자이고 남자는 남자이다. 이를 이해하면 ‘나의 선택이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내 자유의지의 산물일 수 있다’를 이해할 수 있다.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때는 ‘선결정’은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이와 달리,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자유의지’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때는 선결정이냐 아니냐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지문을 읽을 때는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글을 잘못 읽게 된다. 그것을 걱정한 출제 선생님이 둘을 구별하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 학급 체험학습을 가려 할 때, 철수 쌤은 연극 관람과 같은 문화 체험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은 놀이동산에서 노는 체험을 생각하는 바람에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어떤 것을 체험이라 할 수 있는지를 철수 쌤과 학생들이 합의한 후에야 갈 곳을 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학생이 교과서에서 본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자기가 문학 시간에 배웠던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했는데 잘 안 됐던 것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동음이의의 개념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모더니즘과 특수한 1930년대 한국 문학에서의 모더니즘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었더니, 그때 가서야 학생은 이해를 했다. 이 일들은 글 읽기에 동음이의의 개념을 이해하는 국어 능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어떤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주체는 나일 수 있다. … 로 가정해보자.
국어 출제 선생님들은 친절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내용은 사례를 들어 설명해 준다고 했다. 지문에서 ‘가정해보’는 것은 친절한 설명에 해당한다.
‘어떤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주체는 나일 수 있다.’는 철수 쌤도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말이다. 그래서 친절한 국어 선생님은 ‘어떤 선택’의 사례로 ‘갑이 딸기 우유를 선택했다’를 들고,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의 사례로 ‘선결정되지 않은’을 들었다. (위 지문에는 없지만 원래 지문에는 ‘무작위로 일어나다’와 ‘선결정되지 않다’가 같은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주체는 나’의 사례로 ‘갑은 그 선택의 주체일 수 있다.’를 들었다. 이를 벤다어이그램을 그려가며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누누이 말하지만 친절한 국어 선생님을 믿길 바란다. 그리고 위와 같이 추상적 내용을 사례로 설명하는 글을 벤다이어그램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많이 하자. 그러면 글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어떤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주체는 나일 수 있다.
‘A어도 B일 수 있다’는 문장 구조는 A라면 당연히 B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을 때 사용한다. ‘남자여도 머리가 길 수 있다.’는 남자니까 당연히 머리가 짧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는 말이다. 지문에서 ‘어떤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주체는 나일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이 무작위로 일어난다면 당연히 선택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는 말이다.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지문의 내용으로 보아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갑의 이러한 신경 사건이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도 갑은 그 선택의 주체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당연히 선택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음과 같은 판정도로 지문을 이해할 수 있다.
지문에 ‘이렇게 반자유의지 논증의 무작위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선결정되어 있지 않는데 선택의 주체가 나이니, 자유의지의 산물일 조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 그 경우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결론이 될 것이므로 반자유의지 논증이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