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갑이 냉장고 문을 여니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만 있다고 해 보자. 갑은 이것 중 하나를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반자유의지 논증은 갑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우선 임의의 선택은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거나 무작위로 일어난다. 여기서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것은 선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반자유의지 논증은 선결정 가정과 무작위 가정을 모두 고려한다.
그러나 이 논증에 관한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다. 반자유의지 논증을 비판하는 한 입장에 따르면 반자유의지 논증의 선결정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무작위 가정을 고려할 때의 결론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반자유의지 논증의 결론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것만은 … ]
*‘반대되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옳고 그름을 이유를 들어 밝힘. 또는 그 근거나 이유. ( )
*대상이나 장소 따위를 일정하게 정하지 아니함. ( )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앞선’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그것이 없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 )
*추리를 할 때,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 ( )
*‘그것과 관련된 조건이나 환경’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 선택은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거나 무작위로 일어난다. …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것은 선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살다 보면 어떤 문제(subject)에 대해 옳고 그름을 밝혀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논제(論題)에 대해 논증(論證)한다’고 한다. 논증은 전제(근거, 이유)를 통해 결론(주장, 의견)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문에서 설명하는 ‘반자유의지 논증’은 그 사례이다.
앞에서 파생법(실질 형태소에 접사를 붙여 파생어를 만드는 단어 형성 방법.)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국어 능력이라 하였다. 그에 따라 우선 ‘반-’이 ‘반대되는’이나 ‘절반 정도’의 의미를 지닌 접사라는 것과,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는 내용을 통해, 고등학생이라면 ‘반자유의지’에서 접사 ‘반(反)-’이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철수 쌤은 ‘논증’이라는 말에 반자유의지 논증을 연역법으로 정리해 이해하는 버릇이 있는데, 지문의 논증을 이해하려면 모순 관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철수 샘은 여자가 아니다’라고 하면 ‘철수 샘은 남자다.’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철수 샘은 아침에 일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철수 샘은 밤에 일한다’라고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철수 샘은 새벽에 일한다’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사례가 다른 이유는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상호 배타적 관계인 반면 ‘아침’과 ‘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자이면 남자일 수 없고 남자이면 여자일 수 없으나, 아침과 밤 외에 제3의 경우인 ‘새벽’, ‘낮’이 있는 것이다. 전자를 모순 관계, 후자를 반대 관계라고 한다.
철수 쌤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 임의의 선택은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거나 무작위로 일어난다. … 이러한 전제하에’라는 내용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연역법을 떠올린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려면, 선택에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 두 가지밖에 없고, 선택에는 자유의지가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를 고려하면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거나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말은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한다는 말과 모순 관계에 있는 말이다. 그래서 철수 쌤은 ‘임의의 선택은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거나 무작위로 일어는 경우와 자유의지로 일어나는 경우 두 가지만 있다.’는 숨은 전제를 생각하면서 지문을 읽은 것이다.
그런데 지문에는 또 다른 모순 관계의 말이 있다.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것은 선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결국 ‘무작위로 일어난다’와 ‘선결정된다’는 모순 관계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계층 구조 또는 벤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전제와 결론이 적절하게 연결되었을 때 올바른 논증이다. 그런데 앞에서 누누이 얘기했다시피 모든 논증이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진리가 아니다. 지문에서 ‘이 논증에 관한 … 비판이 가능… 반자유의지 논증을 비판하는 한 입장’이라고 했는데, 이는 논증과 그 논증에 대한 비판을 설명한 글의 한 사례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논증에서는 전제의 건전성과 결론의 타당성이 비판이 대상이 된다. 즉 전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전제와 결론 사이에 관련이 없거나 잘못 관련지은 것을 증명하면 올바른 비판이 되는 것이다. 지문에서 반자유의지 논증의 비판을 다시 정리해 보자.
이때 철수 쌤은 논리곱이라는 수학적 사고를 이용하며 글을 읽는다. 앞에서 ‘사람이면 다야?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라는 말 속에 있는 논리를 설명한 적이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윤리도덕적 조건을 갖추었을 때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조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해야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수학적으로는 논리곱이라 하고 ‘사람의 겉모습 ∧ 윤리도덕’으로 표현한다. 이를 알고 있기에 철수 쌤은 위 비판에 숨은 전제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비판론자들은 둘 중에 하나만 받아들일 수 있으니 반자유의지 논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숨은 전제가 어떻게 반자유의지 논증의 비판에 쓰이게 된 것일까?
반자유의지 논증에서 결론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 결론의 전제를 다시 살펴 보자. 지문에 ‘선결정 가정’과 ‘무작위 가정’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모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려면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아야 한다. 둘 중에 하나라도 옳지 않으면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을 보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보장하다’라는 말을 꼭 알아 두자. 그것은 ‘반드시 됨, 100% 확률로 됨.’을 뜻한다.)
그런데 위에서 뭐라 했는가? 선결정과 무작위는 모순 관계로서, 어느 하나가 인정되면 다른 하나는 인정될 수 없다. 즉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이면서 여자인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방이 있다 하자. 그 방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 참이 되려면 동시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자유의지 논증의 문제점을 비판론자들이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파고든 것이다.
철수 쌤은 이런 지문을 가르칠 때가 제일 난감하다. 순전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해야 하는 내용이어서,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실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회의하며 시큰둥해 하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이끌어내야 하니 이중고에 시달린다.
사실 이런 지문을 접했을 때 학생들이 국어를 많이 포기한다. 모순 관계니 논리곱이니 하는 것은 정말이지 머리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역설적이게도 이런 지문을 뚫고 나갔을 때 국어의 참맛을 알게 된다는 얘기도 된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햄릿의 고뇌만큼이나
“포기하느냐 뚫고 나가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학생의 고뇌도 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죽느냐 사느냐, 포기하느냐 뚫고 나가느냐! 이것들도 모순 관계로구나, 동시에 취할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