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제가 창조주라면,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진리나 법칙을 일단 만들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창조주 자체는 하나의 일관된 무언가일 수는 있겠지만, 그가 창조한 이 세상에 굳이 진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요.
창조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고 싶어서든, 특정 실험을 통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든, 그는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세상을 창조했겠죠. 그러한 필요가 우선이기에, 해당 목적만 달성된다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진리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진리라고 굳게 믿게 되지만, 거기에는 100퍼센트의 근거가 없습니다.
수학은, 시궁창같은 현실과는 달리 100퍼센트의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마음은 숫자가 아니기에, 우리가 수학을 아무리 굳게 믿더라도, 흐물흐물한 우리 일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죠.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우정이나 사랑은 고귀한 가치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에, 그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우리가 일상을 견뎌내고 있는 이 거대한, 현실이라는 시궁창의 본 모습은, 진리 또는 가치의 정원이 아니라, 생명력의 도가니라고 보는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의 원동력도, 보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도 생명력을 쥐어 짜내어 온 세상을 자기화 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특정한 방향이 있어야 하고,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은 다만 그들의 스타일을 선택할 뿐입니다.
원동력은 동일하지만, 이 세상을 자기화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는지가, 바로 그 스타일을 결정하게 되죠.
진보는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는 밑에 있는 사람들과도 연합하려 하기에 보수와는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역시 그렇습니다. 원동력은 동일하기에,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온 세상의 자기화입니다.
문제는, 진보의 스타일을 선택한 자들 중에서도, 죽을 때까지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는 전체 인류와 끝까지 함께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인류애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스타일을 모든 인류에게 관철시키려는(홀로 온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수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의 압박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스타일을 관철시키려는 생명력으로 가득찬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과격해집니다.
극좌와 극우는 결국 만난다는 말은 여기서 생겨난 듯합니다. 죽기 전에 온 세상의 자기화를 실현하려면, 논리와 예의따위는 중요하지 않죠. 궁극의 목표를 이뤄 내려면, 가스통으로 위협을 가하거나 글로써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절망에서 비롯되죠. 절망은 희망, 즉 생명력의 반대입니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악성 댓글은 이를 이용하여 자기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는 자들을 이 세상에서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죠.
그래서 과격한 진보의 글은 얼핏 보면 논리적이지만, 그 원동력은 악성 댓글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 진영 안에서도 어떤 사람의 말에, 어떤 스타일에 동조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면, 일단 그들의 글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보인다면, 그는 같은 진보 진영 사람들과도 끝까지 함께 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궁극의 목표는, 모든 이들을 배제하고 홀로 온 세상의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