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 오가이(森鴎外)가 쓴 단편소설 《아베일족(阿部 一族)》은 1913년 문예지 <중앙공론(中央公論)>에 처음 발표했다. 같은 해 개작을 해서 잡지 <의지(意地)>에 실었다. 오가이가 51세에 발표한 이 작품은 쿠마모토현 호소가와 번주가 죽으면서 무사들의 순사(殉死) 과정과 암투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이 대담은 주군을 위해 할복하는 순사 관습과 일본의 집단 이념을 두고 주인공 아베 야이치에몬, 다다토시 번주, 작가 모리 오가이, 미스 마플까지 네 명이 가상의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마플 안녕하세요, 이렇게 세 분을 모시고 단편소설 《아베일족》 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대담을 나누기에는 인원이 많은 감이 있습니다만 상대방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저는 반갑습니다. 우선 이 작품을 쓰신 오가이 작가님에게 제 스타일대로 가장 궁금한 점부터 먼저 질문을 하겠습니다. 전에 작가님 작품 《기러기》를 두고 오타마님과 대담을 나눴습니다. 저는 그 작품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작가가 일본의 봉건주의 잔재인 입신양명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집단 이념보다 개인의 삶에 호의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느꼈어요. 메이지 유신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여성의 삶을 조명했다고 보거든요. 오가이님은 작품 《무희》에서 보는 것처럼 개인 행복을 추구한 서양 가치관과 가문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입신양명을 중시한 과거의 가치관 사이에서 고뇌합니다. 독일 유학중 사귄 독일여성 엘리스와 약혼을 했지만 집안의 뜻에 부응하고자 뿌리치고 돌아왔지요. 서양의 개인주의와 일본의 집단주의 선택에서 집단주의를 선택하셨던건데요. 개인주의를 선택하는 일을 두고 깊이 고민합니다. 오가이님의 신체는 일본이라는 집단이 추구한 봉건주의적 공간에 저당 잡혔을지 모르나 마음에는 이미 서양으로부터 수혈받은 개인주의를 부정하기 어려워 수동적 삶을 살던 주인공 오타마의 자아에 '개인으로서의 자각'이라는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첩 살림을 하는 여성이 마음속에 둔 외간 남자를 만나러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외출을 감행했잖습니까. 굉장한 용기였다고 보거든요. 2년 후 발표한 《아베 일족》에서는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오가이 네 안녕하세요. 저도 드디어 미스 마플의 대담에 참여하게 되는군요. 화혼양재는 제가 활동하던 당시 시대 이념이었습니다. 가문과 소속을 중시하는 일본의 전통을 정신으로 삼고 서양에서 흡수한 학문이나 지식, 기술을 재료로 삼아 발전하는 풍토가 메이지 유신 골자였지요. 마플님이 말씀하신 《무희》는 서양 학문을 공부한 제가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 전통을 따르는 일에 고뇌가 담긴 작품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작품에서 저는 개인을 포기했지요. 그러나 《아베 일족》에서는 권력에 저항했다, 안 했다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고 봐요. 어디까지나 독자가 판단할 부분입니다. 작품 해설에 소개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의 자연스러움'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료(史料)를 조사해 보고, 그 안에 엿보이는 '자연스러움'을 존중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대로입니다.
마플 수필 <역사적 사실 그대로와 역사에서 벗어남>에서 쓰신 소감 말씀이시죠?
오가이 네. 아시다시피 이 작품은 역사 소설입니다. 그래서 "현재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을 보고, 과거의 일도 그대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순사를 미화하거나 사무라이 정신을 과장하고픈 의도도 없고 봉건시대 잔혹한 죽음과 봉건의식 상관관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저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중계하면서 존엄성과 봉건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마플 그러나 소설은 창작이잖습니까.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건 말씀하신 데로 사료이죠. 1910년 5월에 처형된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가 천황 암살 모의 사건에 실패한 후 작가님은 소설 《침묵의 탑》을 쓰셨잖아요. 당시 육군 고위 관료였던 오가이님은 이 소설에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팽배해지는 국가 권력을 우려합니다.
오가이 해석은 독자가 하겠지요. 그럼에도 미스 마플이 제가 강대해지는 집단 이념을 비판한 게 아닌가 해석하신다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근대 교육을 받은 개화된 지식인이지만 일본 전통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가풍이 엄격했지요. 부모님이 요구하신 대의명분을 거역하지 못하고 살아왔어요. 제가 아무리 해외 유학파 엘리트라고 해도 제 무의식에는 일본 문화나 가치관이 작동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외람되이 변경하는 것이 싫었다"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저는 역사 소설은 기본적으로 상상이 개입되는 게 싫습니다. 많은 묘사도 반기지 않습니다. 역사가 왜곡될 우려가 있거든요.
마플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바로 오가이님의 그런 작가관 때문에 당시 활발히 활동한 신감각파와 비교하면 건조한 전개이기도 한데 이런 작법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습니다.
오가이 제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대개 별로라고 하더군요. 주로 젊은 독자들의 의견이지만요.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죽은 번주를 따라 죽는 순사는 말씀대로 집단 이념이죠. 주군이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오직 주군에 봉사한다는 절대 봉건제 이념입니다. 제가 집단 이념을 소설로 다뤘다고 해서 개인주의를 지향한 제 사상이나 신념이 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순사는 집단 이념이지만 제 작품 어디에서도 노골적으로 순사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부채처럼 활짝 펴서 그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 거죠.
마플 바로 그 주군(主君)은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신과 같은 존재였죠. 제가 아는 바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시작해 680여 년 동안 이어진 막부가 어떤 나라와 왕조보다 이런 엄격한 군신 관계를 존속했다고 봅니다. 물론 많은 난이 이어졌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으로 주군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 생각은요?
아베 제 생각도 오가이님과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썼고 오가이님은 봉건시대 순사라는 무사 관습과 그 허위를 독자 판단에 맡기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플 '허위'인가 아닌가는 우리가 특정 역사를 대할 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봅니다. 분명히 상식 이하 역사였지만 이 기준은 현재 기준이지 당시 기준이 아닌 경우가 많잖습니까. 오늘 대담 주제인 순사 같은 경우도 해당되고요. 당대에도 순사의 잔혹한 관습에 불만인 무사가 있지 않았을까요? 조직 분위기에 따르느라 의견을 말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단순히 순사를 '허위'라고 단정한다면 권력자 입장에 있던 다다토시 번주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일동 웃음
다다토시 아베님이 제가 내린 순사 불허 때문에 가문이 참혹한 일을 당했으니 저에게 아무래도 감정이 있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위'라는 말씀을 하신 건지도요. 업을 쌓지 말라고 하던 선조님들 말씀이 떠오르네요. 용서해 주십시오, 아베님.
일동 웃음, 아니 그게 아니에요!
마플 자, 대담자가 많다 보니 조금 어수선합니다. 이 대담을 지켜보실 분들을 위해 진행자인 제가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도 계실 테고, 들어만 보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아베 정말 '중계'이군요.
마플 그런 셈입니다. 오가이님 말씀처럼 순사를 비판했는지 안 했는지는 대담을 나누면서 의견을 나누기로 하지요. 그럼 작품 소개를 하겠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 있으면 오가이님은 지적해 주십시오. 《아베 일족》은 1912년 9월 13일 아침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가 7월 30일 죽은 메이지 천황을 따라 순사한 사건에 충격을 받고 오가이님이《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를 쓴 초고를 개작한 소설입니다. 러일전쟁 등 굵직한 전쟁에서 전략 실패로 참패한 노기는 250년 전 법적으로 금지한 순사를 천황의 죽음을 계기로 부인과 동반 순사했지요. 노기의 순사는 가미카제(神風, かみかぜ) 토양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저는 가미카제 한자어인 신풍에서 천황, 주군, 집단이념이 연결되는데요. 이건 제 생각이니까 그렇고, 다시 작품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오가이님이 충격을 받고 쓰신 이 초고《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는 《아베 일족》과 내용이 다르다고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문학평론집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 따르면 초고는 주제가 명확하고 초반부터 긴박하게 진행된다고 해요. 고진은 오가이님의 개작 이유를 두고 역사소설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읽혀지는 사태를 배제하고자 개작을 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자, 그럼 줄거리 소개하겠습니다. 번주 다다토시님이 에도로 산킨(参勤, さんきん)을 떠나기 전 병이 납니다. 이 병은 쇼군이 내려보낸 전의가 용한 약을 써도 깊어집니다. 결국 이 병 때문에 번주는 죽어요. 대체 어떤 병이기에 급하게 죽는지 작품에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지병으로 추정되는데요. 번주의 건강은 극비사항이므로 가장 가까운 측근 외에는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번주는 자기가 죽음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순사 할 무사 열여덟 명을 지목했습니다. 열여덟 명 가운데는 번주에게 떼를 써서 죽기를 자처한 인물도 있고, 마지못해 허락을 한 무사도 있지요. 그 가운데 아베 야이치에몬이라는 무사가 순사 허락을 간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했다"에서 보는 것처럼 아베님은 신중하고 꼼꼼하게 일처리를 잘하지만 어딘지 가까이하기엔 친밀감이 떨어졌다고 해요. 너무 완벽한 인물은 거리감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번주는 죽고 아베 무사는 살아남았지요.
순사가 결정된 무사들이 장례 이후 한 명씩 할복하는 과정이 이 작품에서 제가 지적하고 싶은 '맹목적인 집단 이념'이라고 봐요. 한편으로는 가족들의 생활안정과 개인과 집안 명예를 얻는 일이기도 했지요. 남은 가족들이 번주에게 충성한 집안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자식, 특히 아들이 순사 한 아버지를 이어 새 번주에게 보직을 계승받습니다. 아버지나 아들이 죽어서 집안 명예를 지키고 경제를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충성 강요, 충성 경쟁 구도였지요. 대를 이은 복종으로 번주는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아베님은 순사 불허로 번주가 죽은 이후에 동료 무사들에게 비웃음을 삽니다. 모욕을 참는다는 건 무사에게 죽음과 같은 일이지요. 그래서 결국 아베님은 순사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집안의 명예를 지키고자 아들들 앞에서 할복을 합니다. 이 소식이 새 번주 귀에 들어가고 젊은 새 번주는 아직 경험과 관용이 부족했으므로 자기 부친 허락이 없었음에도 순사를 한 아베 가문을 괘씸하게 여겨 녹봉을 분할하지요. 이 녹봉 분할 배분으로 아베님의 큰아들인 곤베에는 번의 지위가 하락하게 됩니다. 집안 적장자인 장남이 다른 형제들과 똑같은 지위가 된 것이죠. 체면과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요.
마침내 곤베에가 번주 1주년 추모식에서 상투를 자르며 불만을 표시합니다. 새 번주가 자기 아버지 추모식에서 신하인 곤베에가 만행을 부린 것에 화가 나서 곤베에를 처형합니다. 그다음에는 다 아시다시피 아베님의 여러 아들들이 차남 집에 모여서 항거 준비를 하고 번주는 토벌을 단행해 아베 일족을 처단합니다. 죽은 두 아버지와 산 아들들의 대립도 흥미롭지만 번주가 순사를 허락한 무사는 대개 하급무사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하급무사는 녹봉이 얼마 안 되고 변변치 않은 일을 담당하잖아요. 이런 무사들이 순사를 하면 넉넉한 유족 연금과 아들을 보직에 넣을 수 있으므로 남은 가족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일로 미루어보면 번주는 이미 녹봉을 많이 받는 상급 무사 순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순사를 많이 허락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사자인 다다토시님, 어떠세요?
다다토시 이 작품에서 명확하게 제 의견을 밝히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순사를 요청하는 무사들에게 반가워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순사 허락을 하지는 않지요. 제 속마음은 무사들이 아직 젊은 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미쓰히사를 잘 보필해서 번을 지켜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번주가 순사를 금지하는 모양새도 쇼군에게 나쁘게 비칠 수 있고, 제 사후 미쓰히사 권위가 흔들릴까 봐 불안했죠. 순사를 많이 허용하면 유족에게 사망 연금을 지급해야 하므로 번의 재산이 그만큼 줄어들기도 하고요
마플 번의 재산이 줄어들면 번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습니까?
아베 맞습니다. 번은 한 지역의 정치를 포함해 문화와 풍습, 경제까지 관장했지요.
다다토시 그래서 생각한 게 순사를 많이 허용하지 않는 대신 하급 무사 위주로 순사를 결정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제 결정 때문에 상급 무사였던 아베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네요. 아베가 순사를 간청했을 때 차라리 허락했다면 아베 가문은 제 아들 미쓰히사와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요.
아베 번주님, 이 작품은 역사 소설이라고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장인물이 저희 운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는 순사를 허락하지 않은 번주님이나 새 번주를 원망하는 대신 하야시 게키같은 모략꾼이 이 운명을 재촉했다고 보거든요.
마플 하야시는 이 작품에서 아베 일족의 멸문을 조종하는 인물이지요. 어느 곳에나 모사꾼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오가이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오가이하야시를 등장시킨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베 일족 참사 원인은 다다토시가 아베에게 순사를 허락하지 않은 데에 있지만 그 원인을 가속화할 동력이 필요했고 모략은 이럴 때 필요한 장치입니다. 모략을 악으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나쁜 건 맞습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서 모략은 선동이나 예언처럼 이야기에 기름칠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를테면 셰익스피어 명작 《맥베스》 나 《오셀로》 만 봐도 인간의 권력욕이나 질투를 유발하도록 모략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인물들이 없다면 이 작품들은 생기가 없어요. 발단만 있지 사건이 없게 됩니다. 원인이나 발단을 부추겨서 작품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모략꾼이 합니다. 제가 독일에 유학할 때 문학에 눈을 크게 떴어요. 일본에서도 책을 읽었지만 독일에 가서야 유럽이라는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문화를 수혈받을 수 있었지요. 그때 읽은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경우도 인간의 흔들리는 심성을 건드리며 유혹하는 인물이 나오기에 소설이 전개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제가 《아베일족》을 역사에 기인한 소설로 쓰면서 모략꾼인 하야시 게키를 등장시킨 것도 작품에 생기를 넣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하야시는 젊었죠. 이전 번주 세력을 누르고 새로 등극한 젊은 번주를 앞세워 자기 입지를 세우고 싶은 야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직하게, 올곧게만 정치야심을 실현하기에는 권력구조가 만만치 않아요. 권력경쟁에 치열한 무사들이 우글우글한 번에서 여차하면 제거당하기도 하거든요. 하야시는 자기 서열로는 아베 집안과 같은 상급 무사 집안을 대적하기 어려우니까 젊은 번주를 움직인 거지요.
마플 새 번주는 지혜를 쌓기에는 다양한 경험과 관록이 부족했으니까요. 게다가 전 번주 세력이 남아 있었잖습니까. 이 원로들 관리는 꽤나 신경 쓰이죠. 무조건 대우해 주자니 그렇고 무시할 수도 없고요. 그러기에는 오랜 시간 동안 일군 무리들이 만만치 않아요. 모든 것이 미흡한 상태에서 권력을 탐할지 모르는 무사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겠죠.
오가이 때마침 새 번주에게 닥친 이런 부담 가는 상황을 하야시는 잘 이용한 거죠. 그는 농사짓는 집안 출신입니다. 한미한 태생이었는데 어쩌다 무사가 됐어요. 야망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역사에서 보면, 권력자 옆에서 일의 방향을 조종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지요.
마플 제갈공명이나 사마의 같은 인물을 전략가 또는 책사라고 부르죠. 그런데 반대편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모략꾼이죠. 하야시도 새 번주인 미쓰히사 입장에서는 책사이지만 피해를 당한 쪽에서는 모략꾼, 모사꾼이라는 부정적 명사로 부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오가이 네, 맞습니다. 제 3자가 보기에는 두 경우 다 맞다고 보죠. 제가 하야시를 미쓰히사 책략가로 만든 건 이 작품에서 아베 일족이 맞는 참혹한 결과가 단지 다다토시나 아베 야이치에몬의 선택이 절대적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였어요. 우리가 겪는 여러 일들은 이처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점에서 이해될 수 없는 발화가 있다는 겁니다. 그 발화지점에 어떤 의도가 작동하는가에 따라 세상 일은 어긋나기도 하고 잘 풀어지기도 한다는 점요. 이상 제가 하야시를 작품에 등원시킨 이유입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마플 말씀을 듣고 보니 세상이 더 무서운데요. 하하
아베 저도요. 오가이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고지식합니다. 순사가 불허된 상태에서 세간의 모욕을 당할지라도 잠깐만 참고 있었으면 일족이 몰살되는 비극은 없었을 테니까요. 융통성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집안 명예를 들먹였으나 자기 명예만 생각한 꼴입니다.
오가이 그렇지 않습니다. 봉건시대 아베에게 선택지는 할복이었습니다. 순사를 안 한다고 해도 모욕은 집안 전체가 받을 테고요, 경쟁 무사 집단에서 이런 모욕을 견디는 일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겠지요.
다다토시 제가 죽은 건 1641년 3월 17일입니다.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가 저물고 도쿠가와막부가 열린 지 26년 정도밖에 안 지났어요. 막부 기강이 굉장히 엄혹할 즈음입니다. 쇼군은 시마바라 반란처럼 반란을 막고 지방 권력을 견제하고자 산킨을 운영했죠.
마플 한국 역사에서도 건국 초기에는 군부와 정치를 왕이 직접 관장하는 공포정치를 썼어요. 조선시대만 해도 아버지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에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에 성공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했죠. 건국 초기는 아니지만 프랑스도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방 총독을 일정 기간 베르사유 궁전에 와서 머물게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왕정 직속 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총독을 감시했다고 해요. 베르사유 궁전에 그렇게 많은 방은 말하자면 인질의 방이었던 것이죠. 칼로 잡은 권력이므로 칼을 견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아베 무사가 그런 셈입니다. 무사는 군주 명령에 따라 행동하므로 어떤 군주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죠. 칼을 사용하다 칼로 최후를 마칩니다. 할복을 하든 적에게 죽임을 당하든 처형을 당하든 칼과 함께 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가혹한 직업입니다.
오가이 이 작품에서 언급한 오사카 전투를 비롯해 막부 이전이나 임진난 이전에도 파벌에 소속된 무사는 군주의 수족이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정규군과 별개로 임무를 수행했지요. 막부 말기, 메이지가 가까웠을 즈음에는 기강이 해이해져서 출세에 일신을 의탁했지요. 그러나 막부 초기나 중기까지만 해도 무사들은 비록 군주에 목숨을 저당 잡힌 칼을 쓰는 직업이었으나 그 기본 원칙은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저는 그게 무사의 정신, 무사도라고 봐요. 아베는 신의를 지키고 술수를 쓰지 않는 그런 무사였지요.
마플 네, 그러나 저는 궁금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무사도 정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거죠. 어렴풋이 짐작 가는 건 있습니다만 번과 번주, 즉 파벌을 수호하고 방어하는 봉건시대 사병 집단은 아니었던가요? 비슷비슷한 힘을 가진 경쟁자 속에서 힘의 우위를 가지려던 묵인된 사병 체제 말입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고려시대 무신정권이 집권하면서 내로라하는 무인들은 나라의 정규군에 버금가는 '도방'이라는 사병 집단을 소유했어요. 국정 혼란을 틈탄 이런 '기형적인 질서'가 잠깐 안정을 유지할지 모르지만 결국 또 다른 혼란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일본 무사 역사는 제가 잘 모르지만 사무라이라고 통칭되는 이 무사 집단도 고려 무인집권 때 조직한 사병집단과 맥락은 같다고 봅니다. 오직 한 사람의 군주, 응집된 권력의 요체를 위한 도구였다면 너무 혹평하는 건가요? 물론 무사들의 신의와 지역 질서 안정화는 긍정적 요소가 많아요. 그러나 무사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오직 유일한 권력자와 그 집안을 위해 성립된 구조라는 점에서 일본 사람들이 많이 미화하는 무사도 정신이란 걸 마냥 좋다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체 무사도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분이 말씀해 주실까요?
아베 아무래도 칼잡이인 제가 답변 적격자인 듯싶습니다. 무사도 정신이라고 따로 매뉴얼을 만든 건 없어요. 그렇지만 번마다 일종의 규칙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걸 피력했다면 마플님이 무사도 정신의 밑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아쉽습니다.
오가이 전 아직 멀었어요. 흐흑
일동 (웃음). 아니, 왜 그러세요.
마플 자, 배가 산으로 또 가면 안 되니까 아베님, 차분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아베 네, 얼른 수습해야겠습니다. 무사도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정직, 신의, 충성, 성실, 배려, 공감처럼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공동체 생존을 위해 힘쓰는 것이죠. 전국시대에는 혼자 떠도는 무사들도 있었습니다만 대개 무사는 번에 소속됐습니다. 자기가 속했던 번의 존망에 따라 무사들도 유명을 달리했지요. 때로는 개인 영달을 위해 다른 번으로 이동하기도 했어요. 이런 경우에는 배신자 낙인이 찍히지 않으려면 이전 번의 허락을 받거나 소속된 번의 몰락 이후 다른 번에서 받아들인 경우여야 합니다. 배신자 낙인이 찍히면 그 무사는 어느 쪽에서든 위험에 처합니다. 미스 마플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한 명의 군주에게만 봉사하는 규칙 때문이죠. 이런 부담감에 대한 대가로 번에서는 무사의 공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고 죽으면 유족연금을 줬습니다. 또한 무사 아들은 큰 결격사유만 없다면 아버지를 이어 번의 무사를 계승했어요. 제 아들들이 제가 자결하고 나서도 무사 지위를 유지했던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무사도 정신이란 이렇게 대를 이은 복종이라는 굴레 가운데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고 개인의 사상과 신념을 실현하는 대신 주군에게 봉사하며 지역 질서를 유지하는 당시 사회체제입니다.
오가이 아베님이 제가 소설에서 명징하게 밝히지 않은 무사도 정신을 말씀해 주셨네요.
마플 그렇군요. 제가 생각했던 무사도 개념과 비슷합니다. 자, 여기서 저는 또 궁금합니다. 제가 질문이 많아서 죄송합니다만 이 대담 주제인 '집단 이념' 때문이에요. 이 작품에서 순사한 열여덟 명 가운데 번주의 개를 키우는 사람, 음식의 독을 감시한 사람, 떠돌이 무사로 있다가 다다토시 번주에 기용된 사람 등 고급 무사로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 다수입니다. 다다토시님이 앞에서 하급 무사 위주로 순사를 결정한 건 유족을 배려한 차원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조직인 번에서 자기 직무가 있었던 거지요. 잡무를 주로 맡았던 하급 무사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번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신의를 잘 지키고 있는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고 봐요. 아사다 지로가 쓴 《칼에 지다》에 나온 것처럼 번에서는 심심찮은 배신과 반란이 있었잖아요. 한마디로 제가 정의하는 무사 정신이란 도(道)를 알고 예(禮) 갖추는 겁니다만 인간 사회에서 배신과 모략이 없을 수 없잖습니까. 결국 쇼군 마지막에 다다러서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자본주의 열기가 무사들의 칼도 녹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막부 시대 무사 정신은 아베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찌 보면 도가(道家) 사상을 연상하는 듯한 가치였지만 결국엔 지배자의 지배 이론으로 만들어진 '허위' 같다는 생각이 짙습니다.
다다토시 그렇다고 무사 정신이 폄훼받는 건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사 정신은 일본을 지탱한 신의와 배려에 근본이 되는 철학입니다. 지금은 칼잡이들이 없는 시대이지만 시대정신으로 남아서 일본 사람들이 이 무사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신의와 배려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공중질서를 실행하는 셈이지요.
마플 일본인은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과거에 일본국가가 이웃국가를 침략한 사실이 윤색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권력층 일이다, 라고 구분지으시면, 하 이게 또 얘기가 길어지는데요. 지금 긴 칼과 짧은 칼 이렇게 칼 두 개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호기심이 많은 누군가는 휴대폰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흉기 소지자가 활보한다고 경찰에 신고를 할지도 모릅니다. 네, 다다토시님이 말씀하신 '공공장소에서 공중질서'를 지키는 공공의 선은 어느 정도는 개인의 인내와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세 분은 모두 일본인들이시니까 제 논리가 기분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혜량 해주세요.
아베 아닙니다. 일본 사람이라서기 보다는 제가 그 시대 무사라서 맹신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다토시님도 태생이 그러하므로 무사 정신을 의심하지 않은 듯싶습니다. 거의 맹목적인 믿음이자 복종이었습니다. 다만, 오가이님이 밝힌 "그 시대에는 그 시대대로 지켜야 할 모럴(moral)이 있다"는 뜻을 마플님이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마플 저는 당연히 수긍합니다. 그러나 그 지켜야 할 모럴이 부패하고 부당한 모럴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제가 이 작품에서 집단 이념을 본 이유는 사는 동안은 번주나 번에 맹목적 충성을 다 하면서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따라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도 할복으로. 너무 잔인하잖아요. 이 작품 해설에서는 "무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라고 하면서 "이 작품은 무사도 정신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사들은 그게 악습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는 맹목적인 맹신이라는 느낌입니다. 이를테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한 채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나오는 참담한 모습이 중첩되네요.
오가이 어느 부분이요?
마플 "무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라는 해석은 무사들이 주군을 따라 앞다퉈 죽으려는 모습, 또는 아베님 아들들이 죽음으로라도 집안 명예를 지키려는 고집을 가리킨 말이잖습니까. 내가 모시던 군주를 따라 죽는 일은 명예로운 죽음이다, 죽어서라도 선친과 집안 명예를 지키겠다 그런 의미지요. 아베님도 순사 불허로 불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권력자에게 대항하듯 미쓰히사 번주 등극 후에 과감하게 순사를 합니다. 아베님 아들들도 아버지 사후 녹봉을 분할 한 새 번주에게 항명하듯 집단행동을 감행했죠. 새 번주 입장에서 보면 명령 불복종입니다. 아베님 일가에서 보면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의기로운 행동이고요. 이 작품 해설에서는 이 부분을 가리켜 "절대 권력에 희생된 의지가 강한 무사"로 밝힙니다. 저도 아베 일가가 보인 단체 항명은 권력에의 저항이라고 생각해요. 죽음마저 불사한다는 게 조금은 융통성 없어 보입니다만. 이마저도 지금 시각이지 당시 시각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모습을 뭉뚱그려 '무사의 정신'이라고 획일화, 단순화하는 건 무리입니다. 무사들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번주의 가치관이나 성격, 번 경영방식도 달랐을 테니까요.
제 의견이 자꾸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만 한번 더 반론을 펴보겠습니다. 어떤 무사가 있다고 가정해 보죠. 이 무사는 번에 소속된 무사이지만 번주에게 받는 녹봉이나 녹미와는 별도로 재산이 좀 있는 편입니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넉넉한 재산이 있어요. 물론 번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무사보다 녹봉이나 녹미를 후하게 지급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사가 번주가 죽었을 때 유족 연금이나 자기 아들 처지를 보장해 주려고 순사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번주와 각별한 사이였거나 남다른 충성심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본 순사는 하급 관리들 위주였다는 게 포인트예요. 이 작품에서 순사가 결정된 어떤 무사들은 녹봉은커녕 변변치 않은 녹미 몇 두 받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결국 돈 때문에, 녹미 몇 두 간신히 받아 근근이 사는 처지였던 하급 무사가 생각한 건 순사를 해서 명예도 얻고, 가솔들 먹고사는 일 걱정을 덜어주자는 사후 대책인 거죠. 일종의 유족연금 입니다. 정말 놀라운 건 순사자로 결정된 아들이 죽음이 두려워 시간을 미루면서 낮잠을 자는데 그 어머니가 낮잠을 너무 길게 잔다고 며느리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아들이 어서 죽어줘야 남은 우리가 산다는 희생자 이론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는 말을 하려면 굉장히 슬픈 이런 배경을 덧붙여야 한다고 봅니다. 먹고 살만 했다면 번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들어갔다 해도 번주와 특별히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순사를 간청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돈 없는 사람이 번에 소속된 무사가 되어 번과 번주에 목숨을 저당 잡힌 모습으로 비칩니다. 어떤 순사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어난 일이잖아요.
다다토시 마플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무사들이 난립했던 일본 전국 통일 전 상황이 떠오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야망을 품고 많은 무사를 모아 결집시켰어요. 그전까지는 지방마다 각자 파벌에 소속된 무사나 떠돌이 무사들의 양립 상태였습니다. 도요토미는 이 떠돌이 무사들을 규합하면 큰 세력이 될 것을 알고 있었지요. 보수를 지급하고 생활을 안정시켜 주면 자기 사람이 된다는 것을요. 큰 그림을 그린 이 계획은 역사가 증명했듯 성공했습니다. 도요토미가 최종 승자가 되면서 이 무사들은 상급 무사 대우를 받아요.
마플 개국공신이잖아요.
다다토시 그렇죠. 도요토미는 자기 세력에 들어온 무사들을 분류합니다. 그리고 정규군을 편성하고, 정규군 지휘부에 이 무사들을 배치하기도 했어요. 말하자면 칼잡이 출신이 군인이 된 경우입니다. 고수 무사들은 도요토미 옆에서 보좌했고요, 본격 정치인이 된 셈입니다. 이런 준비가 끝나자 조선 침략이 시작됩니다. 일본에서 무사는 여전히 충성과 신의로 대변됩니다. 이 무사 정신 뿌리가 생각보다 깊습니다. 돈에 좌우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했어요.
마플 다다토시님, 앞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무사 정신은 신의와 배려로 공공질서, 공공의 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조금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 사람의 권력자를 향한 맹목적 복종, 맹신, 어찌 보면 명예와 자본에의 굴종이기도 한데 충성과 신의라는 무사 정신이 오늘날까지 작동한다고 보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일본의 정신적 중추가 무사 정신이라면 왜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했으며 반성하지 않는 걸까요? 사과만 해도 그래요. 사과는 여러 번 했지만 전 총리 사과, 장관의 사과만 있었지요. 권력 최정상부인 현직총리나 일본 정부의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습니다. 독일과 아주 딴판이죠. 일례로 조선인 징용 배상이 한국 대법원 판결로 결정 나고 위안부 피해자 활동에 상응해 일본은 경제 보복을 했었습니다. 이게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세계평화 질서를 지키는 태도는 아니잖아요.
다다토시 무사가 활동했던 17세기와 21세기 현대는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일본은 패전을 경험한 나라이면서 경제대국을 이룬, 그래서 잘 살던 옛날을 향수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충성, 신의와 같은 무사 정신은 많이 쇠퇴했지요. 이런 점에서 저는 무사 정신이 가진 도를 지키는 절제의 미덕이 소멸된 게 많이 아쉽습니다.
아베 이렇게 말하면 무사 정신을 합리화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무사는 대개 청빈합니다. 녹봉을 많이 받았어도 사치를 부리지 않았어요. 가난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어떡하든 도우려고도 했어요. 기본 예의를 지키려는 품위가 있었지요. 일본이 지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 개인을 놓고 보면 이런 절제와 예의가 남아 있습니다.
마플 어떤 근거로 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일본 정부는 도가 지나친 감이 있으나 개인은 안 그렇다, 그런 의미로 들립니다. 이런 논리라면 현직 총리도 정치 동료, 친구나 가족 개인이 볼 때는 괜찮은 사람일겁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유대인을 몰아 넣은 소장도 퇴근 후에는 집에 돌아와 자녀들에게 서정적인 슈베르트 피아노 곡을 연주한 다정한 아버지였으니까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정적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암살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도 맑은 색조로 수채화 풍경을 즐겨 그린 감성 많은 아버지였고요. 일본의 현직 총리는 정치인입니다. 정책 수립에 최종 권한을 가졌죠. 이런 위치에 있는 인물이 가진 이념은 집단에 큰 영향을 행사합니다. 정부 중요 요직에 있는, 그것도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을 개인사만 투영해서 좋은 점만 부각시킨다면 그런 국가는 사조직이죠. 일례로 북한을 보면 동의하실 겁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인간이라면 어딜 가나 이런저런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잖아요. 저는 지금 민족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번에 소속된 무사도 집단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저는 그래서 충성, 신의와 같은 봉건시대 무사 정신이 일본의 군국주의 바탕이 된 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한마디로 무사 정신을 이미지 한 컷으로 떠올리면 큰 봉오리 한 개로 우뚝 솟은 후지산 같다고나 할까요. 후지산은 낮고 높은 등성이로 연결된 다른 산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 후지산을 일본 사람들은 일본정신을, 일본정신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일본정신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할복은 고통을 극대화하는 관습인데 이걸 명예로 여기는 모습은 공포스러워요. 피가 튀고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할복 당사자가 감내하면서 열 십자로 배를 가르는 야만을 '의식(意式)'이라고 포장하는 게 도저히.
아베 야만이라고까지... 그래서 고통을 줄이고자 가이샤크(介錯)가 셋푸쿠(切腹)를 도와줍니다.
마플 아니, 집단이 개인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행위는 야만이죠. 자의든 타의든 할복은 실정법이 아닌 집단이 계승한 관습법으로 형벌을 집행하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할복은 봉건관습입니다. 당시 실정법, 즉 성문법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 관습법 남용은 개인의 존엄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점도 동의하기 어려우신가요? 그 셋푸쿠가 외국인이 부를 때는 하라끼리(腹切り)라고 하죠?
아베 네, 한자는 같은 데 일본 사람이 부르는 말과 외국인이 쓰는 말이 다르더군요.
마플 1962년에 개봉한 영화 <할복(一命)>을 보고 정말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 영화에서 할복의 고통이 잘 드러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지간한 공포 영화를 보면서는 눈썹 하나 깜짝 안 하던 제가 배를 움켜쥘 정도였으니까요. 감독은 죽은 번주가 입던 갑옷을 허수아비처럼 걸어 놓고 관객에게 무사 정신의 허위를 제대로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할복을 두고 한국 작가 박경리 선생은 《일본 산고》라는 수필에서 "새티즘과 매조히즘이 복합된 몬데가네"라고 비판했어요. 할복을 대단한 죽음의 철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순사 할 가족들도 한결같이 가장인 무사의 할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어요. 가족 한 명이 죽어줌으로써 우리 집 명예와 경제가 보장된다 이런 계산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종의 희생양 메커니즘 아닌가요? 누군가를 희생시켜 집단 체제를 유지하는 이것이 '일본인의 집단윤리 또는 체념의 기원'은 아닐는지요. 희생양 메커니즘은 중세 일본뿐만 아니라 르네 지라르가 말한 것처럼 예수와 가야파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고, 현대사에서는 한국처럼 독재정치를 경험한 국가에서도 있었고요. 지금도 집단이나 가족의 안정을 위해 누군가 희생되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세 분의 고견은 어떠신지 궁금한데요. 아무래도 막부시대를 사신 세 분은 답변하시기가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아베, 칼잡이였던 저희로서는... 그리고 시대도 다르고요. 그 시대의 모럴이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겠군요.
마플 네 그렇긴 합니다. 당대 모럴을 지금 시점에서 가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기본 윤리가 있고 이 기본 윤리는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존엄성 같은 거지요. 누군가 또는 집단을 위한 특정인물 희생을 강요한다는 사실은 중세나 현대나 존엄성에 반하는 모럴 아닌가요? 할복을 말하다 보면 당사자는 고통을 명예로 알고, 보는 사람은 고통을 즐긴다는 점에서 박경리 작가가 가리킨 "마조히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정말 이것이 무사 정신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자, 이 긴 대담을 마치기 전에 이 작품을 쓰신 오가이님이 한 말씀해 주십시오. 저만 너무 떠들어서 죄송하기도 합니다.
오가이 이 작품에서 저는 중립을 지키고 중계를 할 뿐인데요. "정(情)은 정이고, 의(義)는 의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베 저택 토벌 전날 옆집 살던 아베의 둘째 아들 야고베에 친구인 마타시치로가 생각한 겁니다. 냉정한 이면이 보이죠. 이 작품에서 독자에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부당한 권위에 대항한 피지배층의 정의와 행동입니다. 거역이 곧 죽음을 뜻한 사무라이 시스템을 폭로하고 싶었습니다.
마플 네, 저도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목숨을 걸고 권력이나 권위에 도전한 아베 일가를 보면서 일본 역사에서 시민혁명은 없었지만 시스템 내부에서는 저항이 있었다는 것에 이 작품의 의의를 둡니다. 다만 친구가 말한 "정(情)은 정이고, 의(義)는 의다"라고 한 말을 짚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의(義)가 '옳다'라는 뜻을 가졌음에 눈이 가는군요. 친구라면, 신의가 두터웠던 무사라면 자기 목숨을 걸고 친구의 억울함을 항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토벌이 옳다는 것인지, 토벌대에 동참하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것인지, 친구네 일족이 할복하는 게 옳다는 것인지 묘연하군요. 자기 친구를 죽이고, 자기가 죽인 그 친구네 일족이 멸문지화 당했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으면서 우쭐대는 장면도 기회주의적인 비열함이 느껴집니다. 오가이님은 비열한 무사로 마타시치로를 등장시켜 신의를 중시한다는 무사도 정신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신 것 같습니다. 긴 대담에 조금은 피곤하실 텐데요. 그럼에도 저는 무사 정신을 두고 여러분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봅니다. 특히 다다토시님의 무사 정신 말씀은 다른 토론 주제가 될 여지를 주셔서 큰 수확입니다.
다다토시 다음에 기회를 마련해 주시면 노구를 끌고 나오겠습니다.
아베 무사 이야기라면 저도 기회를 주십시요.
오가이 미스 마플이 또 다른 작품을 읽으신다면 저도 기회가 오겠지요?
마플 그럼요. 다른 작품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긴 대담 고맙습니다. 모두 안녕히 돌아가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