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 오가이(森鴎外)가 쓴 단편소설 《다카세부네(高瀨舟)》 는 1916년 1월 문예지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했다. '다카세부네'는 수심이 얕은 다카세 강을 지나는 바닥이 평평한 배를 일컫는다. 주로 교토에서 유형지가 있는 오사카로 수형인을 호송한다. 이 작품의 시대배경은 에도 막부 시대로 민중은 극심한 가난에 헐벗고 굶주렸다. 어느 날 다카세부네 도신(導臣) 하네다 쇼베에는 동생을 죽인 젊은 살인범 기스케를 호송한다. 그런데 기스케는 호송되는 여느 죄인과는 다르게 매우 평안한 얼굴로 배에 앉아 사연을 얘기하는데... 미스 마플은 작가 모리 오가이, 도신 하네다 쇼베에와 가상 대담한다.
마플 안녕하세요 오가이님, 쇼베에님. 지난번에 이어 작가님을 다시 뵙습니다. 연이어 뵙게 되어 기대가 많습니다. 쇼베에님은 많은 수형인을 호송하신 분이라 숨겨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이번 대담은 가난, 계급, 안락사, 뭐 다르게 불러도 존엄사라고 정합니다. 섬세하게 나누면 조금 다른 호칭이지만요. 두 분이 인사 나누시죠.
오가이 네, 안녕하세요. 제가 이 대담에 초대받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하하. 제가 작가이기도 하지만 의사였기에 미스 마플이나 쇼베에님 보다 죽음을 좀 더 많이 대면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역시 현장의 일화는 쇼베에님 몫이군요.
쇼베에 저도 반갑습니다. 이런 대담은 처음이라 낯설고 서투를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주로 수형인을 호송했기에 안락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두 분의 진행에 맞추도록 할게요.
오가이 너무 겸양하신 거 아닙니까? 쇼베에님처럼 많은 사연을 가진 분들을 상대하신 분이야말로 하실 말씀이 많지 않을까요?
마플 쇼베에님은 수형인을, 오가이님은 환자를 상대했으니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오가이 아니, 그렇지만 이 대담은 어디까지나 작품에 한정된 시간이니까요.
쇼베에 그렇습니다. 임의로 마구 끌어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지요. 저마다 사정이 다르니까요.
마플 두 분이 이리 정해 놓으시면 오늘 분위기는 차분해져야겠는데요. 어쨌든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이 작품은 오가이님이 쓴 다른 작품보다 분량이 더 짧습니다. 그런데 여운이 긴 이야깁니다. 안락사를 다룬 이야기라 그런가요. 안락사는 편안한 죽음을 가리키잖아요. 죽음을 맞는 당사자가 원해서 다른 사람이 죽음을 조력해 주므로 강제로 목숨을 빼앗는 살해와는 다르죠. 스스로 죽는 자살과도 다르고요. 대개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은 고통에 빠진 상태일 텐데요. 지병이 깊거나 장애가 심해서 약물이나 수술로 치유가 불가능하고 연명하는 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죠. 코마 상태도 있고요.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기스케는 고통스러운 동생을 죽이고 살인자가 됩니다. 본인은 안락사를 조력했다고 주장하죠. 그러나 법은 따듯한 가슴이 없기에 기스케를 유형지로 보냅니다.
오가이 안락사는 이 소설이 출간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안락사가 법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허용되지 않았어요. 스위스, 벨기에, 캐나다에서는 조력자살, 안락사 등으로 절차는 상이하나 시행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존엄사법, 적극적 안락사법으로 호칭되는 이 법은 13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데요. 법에도 허점이 있으므로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끊는 일은 존엄성 논란이 따릅니다.
마플 생명을 다루는 일이므로 쉬울 수가 없지요. 한국은 2016년에 연명의료결정법이 통과되어 2018년부터 시행 중입니다. 이 법은 환자가 사전에 유언장처럼 작성해서 서명하는 방식입니다. 의료적으로 신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건데요, 점점 호응도가 올라간다고 해요. 저는 2021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등록했고, 훨씬 이전인 2010년에는 뇌사일 경우 장기기증에 서약했습니다. 물론 제 의사는 명확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면 가족 의견이 어떻게 반영될지는 변수입니다. 사전연명의료법은 죽음 당사자의 사전 동의에도 불구하고 최후 결정은 의사가 내리죠. 연명치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서 환자는 의사의 결정에 따라 모든 치료를 중단합니다. 이때 안락사와는 다르게 환자는 최후의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전연명의료법은 보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가이 혹시 불교신자이십니까?
마플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오가이 무신론자가 의외로 많이 서명한다고 하더군요. 이건 심리학적으로 연구가 필요해 보이네요.
마플 아, 그런가요? 근데 저는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유신론과 유물론 그 어디 경계에 있습니다.
오가이 역시 현대인은 복잡하군요, 하하. 일본도 말기 환자가 '종말기 의료에 관한 사전의향서'를 공증해서 제출하면 의료진이 수용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직 안락사가 합법이 되지 않았지만 진일보한 셈입니다.
쇼베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유교와 불교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에서 연명치료 거부법은 획기적인 변화죠. 유교와 불교는 조상 숭배와 죽음을 숭고하게 여기는 사상이 지배적입니다. 제사를 지내고 절에 영혼을 모셔서 넋을 달래주는 풍습이 있죠. 저는 동양에서 종교나 철학이 안락사에 개입되었기 때문에 안락사에 부정적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진단합니다.
인도 영화 <청원>
마플 동양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풍습과 제도의 밑절미로 삼은 서양도 안락사에 반대하는 것으로 압니다. 인간의 생명은 신이 관장한다는 오랜 관습과 믿음 때문이지요. 오늘 주제와 관련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인도 영화 <청원>이라고 있어요. 스타 마술사였던 남성이 사고로 전신마비가 됩니다.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란 눈꺼풀 깜박이고 말을 할 수 있는 것 외에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누워서만 지냅니다. 상상이 가지 않는 절망 상태였겠지요. 사는 일이 죽음보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해 의사 친구에게 안락사를 부탁하지만 위법이라고 거절당합니다. 그러다가 새로 고용한 여성 간병인과 만나면서 상황이 변합니다. 그리고 안락사 청원을 법원에 신청합니다.
오가이 한 번에 잘 될 리가 없었겠죠?
마플 한 번에 허용되면 영화가 안 만들어졌겠지요. 아시다시피 인도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나라이잖아요. 법원은 계속 기각하고 청원자는 좌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판에서 남성의 어머니가 법정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지요. 내 아들 이튼의 생명은 누구 것이냐라고 판사에게 묻습니다. 이튼은 그 남성 이름에요. 이튼을 낳은 어머니인 나의 것이냐,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것이냐, 신의 것이냐. 어머니는 이튼의 인생은 이튼의 것이라고 법정에서 호소하면서 이제 자기 아들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휴, 어머니가 아들의 안락사를 간청할 때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오가이 굉장한 어머니네요. 다른 이의 생명을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쇼베에 그 어머니는 아들이 14년 동안 고통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봤잖아요. 참혹했겠죠.
마플 그래서 어머니의 절절한 호소는 재판부 마음을 움직입니다. 또 다른 영화도 있어요. 실화를 각색한 영화인데 미국 영화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이라는 영화예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 알 파치노가 나와요. 영화 내용은 단순합니다. 병리학자 잭 케보키언이 불치병 환자 130여 명을 상담하고 이 가운데 열명을 약물주입으로 고통 없이 안락사시킵니다. 이 실화를 영화로 만들고 미국에선 논란이 격렬해졌었다고 합니다. 개신교 신자 다수로 구성된 미국 사회에서 이 또한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비친 거죠.
오가이 개인이 안락사를 시행하다니 놀라운 일이네요.
마플 당연히 불법과 돈벌이, 양심, 시행자 자질이 도마 위에 올랐지요. 사이비 종교도 의심받았을 테고요.
쇼베에 헉, 법이 보장됐습니까?
마플 아뇨. 잭 케보키언은 살인죄로 수감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모범수로 9년 만에 가석방됐어요. 그리고 83세인 2011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책도 내고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그에게 '죽음의 의사(Dr. Death)'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이 사람은 자기가 시행한 안락사를 가리켜 의료(Medical)와 자살(Suicide)의 합성어인 '메디사이드(Medicide)'로 불렀다고 해요. 최근에는 안락사를 해 주는 스위스 단체도 생겼으니 이제 이 문제는 현실로 바짝 다가온 셈입니다.
오가이 대단한 의사이군요. 고통이 극심해 죽음을 호소하는 환자를 보면서 대부분 의사는 안락사를 생각만 할 뿐 용기를 내지 못하거든요. 안락사는 영어로 'Euthanasia'라고 하는데 어원이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합니다. 확장 해석하면 '죽을 권리'라는 뜻도 있어요.
마플 오, 문학적 단어네요.
오가이 그렇죠. 제가 의사 출신이니까 이 내용을 부연 설명하자면 안락사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연명의료 중지처럼 더 이상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행위는 소극적 안락사이고, 잭 케보키언처럼 약물 주입으로 연명을 마치도록 돕는 행위는 적극적 안락사입니다. 좀 더 고통 없는 죽음을 안내하지요. 저도 의사로 지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잭 케보키언도 의사였으므로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겁니다. 일상에서 목격하는 죽음이지만 존엄성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요.
마플 잭은 안락사 시행 이전에 사형수를 안락사시키고 장기적출을 맡았다고 해요. 이 일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이식 수술을 기다리는 위급한 환자, 인간이 인간의 장기를 적출하는 일, 삶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유린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요.
쇼베에 저처럼 수형인을 호송하는 직업도 삶과 죽음을 많이 생각합니다. 살인을 한 사람들사연도 제 각각이거든요. 범죄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살인 동기를 알고 나면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더군요.
영화 <You don’t know Jack?> 실존 인물, 병리학자 잭 케보키언
마플 그래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말도 나온 거겠지요. 그러나 또 Every Day a Good Day를 실현하며 살기에는 이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잖아요. 자, 이제 《다카세부네》 이야기를 해 보죠. 저는 동생을 죽인 기스케 입장을 생각해 봤습니다. 반대로 제가 동생이라면 저도 죽여달라고 했을 것 같고요. 고통을 견딜 수 없다면 고통을 놓아야 한다고 봐요. 이 작품에서 기스케 이름이 한자로 '희조(喜助)'인 점도 눈여겨봤습니다. 우리말로 풀면 '기쁨을 (얻기 위해) 돕는다'라는 뜻에요. 안락사 뜻이 이름에 숨어 있죠. 기스케 형제는 최하 빈민층이었어요. 부모는 기스케 형제가 어렸을 때 전염병으로 일찍 죽고 어린 형제만 남았죠. 형제가 직물 공장에서 일하면서 겨우 먹고살다가 동생이 덜컥 병에 걸립니다. 돈이 있으면 고칠 수 있었지만 치료비는커녕 밥 먹고 살기도 힘들었어요. 형 혼자 일하면서 겨우 살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착한 동생은 형 혼자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서 면도칼로 목을 긋습니다.
쇼베이 자기가 없으면 형이 고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마플 그런 거죠. 그런데 이 자살이 실패하면서 이 이야기 주제인 안락사가 등장합니다. 때마침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 그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 것도 이 작품에서 탁월한 얼개였습니다. 문학은 야박하고 잔혹한 설정을 만들면서 현실을 반영하지 않나 싶은데요. 오가이님은 이 장면을 건조하게 들려주셨어요.
오가이 그 형제는 사는 일도 죽는 일도 굉장히 힘들었잖아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에게 관찰자 시점에서 보는 방식이 외려 긴 여운을 남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작품 인물과 사건에 독자가 휘말리면 감정적 공감도는 높아지죠. 반면에 문제 핵심을 비껴갈 수 있어요. 저는 그렇습니다. 기스케가 왜 살인범이 되었는가, 독자인 내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여러 화두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건조한 서술은 독자에게 카드 패를 책상 위에 쭉 늘어놓듯 침착하게 주제에 접근하도록 해 주죠.
마플 동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결해 준 형에게 어떤 죄목을 적용할지, 그건 우리가 다시 논쟁할 소재가 되는 건가요. 살인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만 이 경우 인간적 고뇌가 따릅니다. 쇼베에님도 그런 갈등을 토로하셨어요.
쇼베에 네, 제가 호송선을 몰면서 별의별 수형인을 다 봅니다. 그러나 대개는 순간의 잘못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 호송선에는 유형을 가는 중죄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살인이나 방화 같은 흉악범보다 절도와 같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이었습니다. 법을 너무 엄격한 잣대로 규정하다 보면 관용이 부족해져서 작은 범죄까지 유형이라는 중벌을 내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있고요.
마플 그렇습니다. 법과 도덕을 철저하게 강요하는 사회는 존엄성을 억압하고 훼손합니다. 한국에서 저는 군부독재 정권에서 학교를 다녔고 사회생활을 했어요. 조작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신 분들도 많았고요. 사회 분위기가 살벌했죠. 언론이 여론을 선동해 마녀사냥을 유도했고요. 그런데 부패는 극심했어요. 그렇게 법이 엄격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 모순이죠. 법이 엄혹한 사회일수록 가진 게 없는 계층은 보호받기 어려우므로 살기 힘들죠. 독재국가에서 법은 기득권이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국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하거든요. 자기들은 힘을 이용해 법망을 빠져나가고 힘없는 사람은 법의 올가미에 걸려들죠.
쇼베에 기스케가 실정법을 어긴 살인범인 건 분명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인명을 해쳤으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 말미에서 제가 의문했던 것처럼 저는 지금도 궁금해요.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것을 죄라고 해야 하나?" 즉 살인 동기를 보면 이게 명확하지 않아요.
마플 그러나 법은 동기가 아닌 결과로 판결합니다.
쇼베에 그러니까요. 법이 그래서 가혹한 거죠. 제가 아는 법이란 억울함을 풀어주고 반윤리적인 것에 엄정해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예요. 억울한 죽음이 있으니 억울한 판결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거예요. 기스케와 동생의 처절한 삶은 개인 문제로 방치하다가 죽으니까 사회 문제로 법의 잣대를 들이댔다는 거요. 뭔가 이상해요.
오가이 이 작품에서는 복지 문제, 나아가 사회 공동체적 인식이 드러납니다. 마플님이 지적하신 '사회 최하위층'이나 '돈이 있으면 고칠 수 있던 병', 쇼베에님이 말씀하신 '처절한 삶은 개인 문제로 방치'와 같은 말씀에서 저소득층 복지, 의료복지, 법의 처신 같은 게 보이죠. 제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에도 시대 수필집인 《오키나구사(翁草)》를 읽고 돈과 행복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어요. 안락사는 의료, 형법, 공동체적 가치관과 같은 여러 분야에 관계됩니다. 단순히 고통을 종결시켜 주는 조력에 그치는 게 아니죠. '죽음의 권리'나 '존엄사'라고 단정 짓기 이전에 '삶의 문제'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삶의 문제'는 쇼베에님처럼 살인 동기를 살피는 일도 해당되고 마플님 의견처럼 사회적 관계와 다 연관된 거죠. 법과 도덕으로 사회 질서가 유지되므로 '삶의 문제'는 개인 문제로 한정돼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 의사들도 환자 상태를 보고 이 환자가 살 수 있을 것인가, 살 수 있다면 장애는 없을까, 장애가 생긴다면 그럼에도 사는 게 환자에게 더 나을까, 하는 식으로 많은 고민을 해요. 나머지는 의료 기술과 환자의 바이탈에 맡기는 수밖에요. 의사로서 무책임한 발언인가요? 그러나 의사도 한 명의 사회 구성원입니다. 의학 기술만으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현실에요.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다카세부네》에서 월급쟁이 쇼베에님의 불만족스러운 삶을 건드린 이유도 죽음을 보고 '삶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마플 오가이님 말씀을 듣고 보니 '품위 있는 죽음(Dying with Dignity)', 즉 '웰 다잉(Well-Dying)'과 '웰 리빙(well-living)'이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떠올려봅니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탐욕이나 성냄, 이기심을 경계하고 배려, 양보, 이해의 가치를 압니다. 동족을 죽이고 짓밟고 망가뜨리면서 얻은 인류의 오랜 학습이죠. 저는 이런 가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인간에게 있다고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 많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여기까지 존속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기스케가 살았던 에도 시대는 봉건시대였다고 해도 사회가 기스케 형제를 돌봤다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죠. 결과만 보면 개인의 문제로 볼 안락사이지만 과정을 보면 사회 모두의 문제로 봅니다.
쇼베에 미스 마플님은 결국 기스케의 살인을 사회문제로 보시는 건가요?
마플 개인의 안락사이기도 했지만 가설을 세우자면 최하 빈곤층에게 사회안전망 제도가 부실해서 일어난 일인데 사회문제 아닌가요? 요즘도 보잖아요. 오랜 간병에 희망이 안 보여 간병살인을 하는 부모, 배우자, 자식. 과도한 의료비 때문에 파산해서 동반 죽음을 선택하는 가정이 늘어납니다. 내용을 파 보면 돈이 개입된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있다면 간병인을 따로 두고 보호자는 생업활동이 제약받지 않습니다. 가정 경제 붕괴로 비참한 최후를 가족이 맞지 않겠죠. 반대로 재산이 없다고 해서 세금을 안 내는 건 아니잖아요. 세금은 사회를 존속할 명분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쉬운 말로 복지 사회라고도 합니다만, 저는 좀 섬세한 호칭이 필요하다고 봐요.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듯이 존엄한 죽음을 맞을 권리를 인정한다면요.
쇼베에 그러고 보니 월급이 적고 개인 시간이 없다고 불만이었던 제가 기스케를 보면서 자족의 의미를 새겼던 점에 조금 송구해지는데요. 남의 불행을 보면서 제 행복의 농도를 가늠하고 있었으니까요.
마플 잔인한 일인데요, 인간은 남을 통해 자기를 투사하지 않습니까?
소베에 그게 참 쉽지 않더군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묵묵히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가이 쇼베에님, 제가 이 작품에서 개인의 행복을 깊이 다루지 않았지만 쇼베에님의 생각이 비난받거나 송구할 감정을 강요당하면 안 됩니다. 저는 근대 교육을 받았지만 봉건시대에 태어나 엄격한 가정에서 성장한 까닭에 아직은 사회 개념이 뚜렷하게 학습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소설에서 쇼베에님의 행복관을 슬쩍 흘린 것이고, 마플님처럼 분명한 입장으로 사회문제와 연결 짓지 못했어요. 이 점은 이 작품의 한계입니다.
쇼베에 네, 저야말로 봉건시대 인물이므로 기스케의 죄와 저의 행복만을 생각했어요.
마플 현대 인물이라고 해도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적 문제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삶의 모습이 다르거든요. 다만, 캐치 프레이드만 현대를 내 걸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 구조 역학 관계를 관용과 포용의 가치에서 접근하고 배려하는 인식과 실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가이 폭주하는 자본주의에서 존엄함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가르쳐주죠. 기스케가 저지른 살인이 뉴스에 나오면 슬프다는 감정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존엄한 삶을 향해 더디지만 한 발짝씩 진보하는 일만이 죽음을 존엄하게 기억한다고 봅니다.
마플 의미 깊은 말씀이십니다. 한국은 정권이 교체되어도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도 참사 등과 같은 대형 참사를 비롯해 건설공사장, 생산현장, 생활고로 인한 죽음과 같은 우울한 소식이 많습니다.
쇼베에 오늘 대담에 저와 같은 호송선 담당자 같은 말단이 참석해서 영광입니다. 비록 하찮은 직업이지만 함께 이야기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옛날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돌아가서 생각이 많아질 것 같은 대담이었습니다. 작품에서 큰 비중이 없던 저에게 이런 기회가 온 것에 감사합니다.
마플 세상에 하찮은 직업이나 하찮은 삶은 없습니다. 하찮은 삶과 직업으로 분류한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쇼베에님도 오가이님도 살펴 가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