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
아마도 기억을 더듬어 쓰고 있기 때문에 앞 전 일기처럼 자세하게 쓰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육인방 구석 침대 2층에서 눈을 떴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코를 골지는 않았나 걱정을 했습니다.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느지막하게 겨우 씻을 수 있었습니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U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곧 산책을 가려고 했는데 C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준비를 하고 사계 해안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면서 여러 일상적인 대화들을 했습니다. 가는 길이 예쁘다고 K와 C는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도로를 따라 쭉 걷다가 해변에 도착해서 사진을 좀 찍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복귀하는 S를 만났습니다. 건강히 전역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U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특수교사 3인방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했습니다. 얼마 전 나무네에서 산 노란 재킷을 입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따뜻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12월 29일인데요.
U의 렌터카를 타고 용머리해안 근처에 있는 올레마당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가서 평소에 먹지도 않는 생선구이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제주에 왔는데 생선구이는 먹어줘야지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불만이 없었습니다. 역시 생선구이는 왜 먹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냥 퍽퍽 퍼먹을 수 있는 게 좋습니다. 그때 시선 끝에 닿는 텔레비전에서 배우의 사망소식이 나왔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그 소식에 함께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고를 접한 저는 어떤 생각을 했어야 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줄입니다.
밥을 먹고 나서는 그들이 가는 카페까지 차를 타고 갔습니다. 저는 소품샵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그 3인방은 책방 겸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E언니에게 줄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날씨가 좋아 산방산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활짝 품을 내어주고 있는 것 같은 산방산을 옆에 두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신인류의 노래를 들었던 것 같네요. 중간중간 돌담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사진도 찍고 즐거웠습니다. 소품샵에 도착해서 인센스 홀더와 스틱을 샀습니다. 쇼핑백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 사계해안으로 갔습니다. 이제부터 용머리해안에 가는 것 말고는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커피와 소금빵을 시키고 이것저것을 했습니다. 12월 26일 일기도 그 카페에서 적은 것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연락도 좀 하고 책도 조금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려 바닷가로 이동했습니다.
사계해안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어요.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사계(沙溪)'에서 '사(沙)'는 해안의 모래, '계(溪)'는 마을 동쪽을 흐르는 시내 /라고 합니다. 대규모 사구지역이라고 하네요. 해변이 참 예뻤습니다. 모래사장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진이 너무 찍고 싶어 졌습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어떤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드리고 저도 찍어드렸습니다.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어 다음 타깃을 물색했습니다. 삼각대를 들고 혼자 돌아다니는 여성분을 발견해서 부탁드렸습니다. 여전히 결과물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찍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용머리해안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네이버지도를 믿고 걸어가다 보니 너무 예쁜 길이 나와 행복했습니다. 좌측에는 산방산을, 우측에는 사계해안을 낀 산책로였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대가로 이상한 길을 안내받았다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백년초가 선인장인걸 알고 계십니까? 무슨… 백년초밭을 지나가느라 바지에 가시가 다 묻었습니다. 여기는 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저찌 꾸역꾸역 길을 찾아 올라와서 평지를 걷고 있는데, 아까 그 삼각대 여성을 만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반가운 척을 해버려 그 분과 소품샵에 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B언니에게 줄 머리끈과 엽서를 하나 샀습니다. 그분도 용머리해안에 간다고 하셔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입장료는 쿨하게 연상녀인 제가 결제했습니다. 들어가서 걷다 보니 멍게와 해삼을 팔더군요. 멍게와 해삼, 소주 한 병까지 2만 원으로 네고에 성공했습니다. 용머리해안에 앉아 바다 1m 거리에서 술을 마시니 꽤 좋았습니다. 한라산 17도 소주가 순한 한라산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요. 순한 한라산을 받았습니다. 동행인 M은 24살이고 광주 옆 담양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원래 호텔경영학과를 나왔는데 전공이 맞지 않아서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같이 용머리해안을 돌았고 간간히 사진도 서로 찍어줬습니다. 용머리해안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용의 머리를 닮아 그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모래와 자갈이 수천 년 동안 쌓여 생성된 암벽인데, 엄청나게 큰 암벽이 모두 자잘한 모래와 자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언가 저에게 있는 문제들도 시간이 모두 해결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안 관람을 끝내고 배가 고프지 않아서 카페에 갔습니다. 바닐라라떼를 한 잔 마시고 M과 함께 흑돼지를 먹으러 갔습니다. 감기약 때문인지 아까 용머리해안에서 마신 소주 기운이 안 가셔서 술은 먹지 않았습니다. 초벌구이가 되어서 나와 맛있었습니다. 흑돼지는 쫄깃해서 맛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와 거의 하루종일 함께 있고 대화하며 느낀 건, 그 사람과 저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으레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사람과 잘 맞아서 인연을 이어갔다-라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M과 저는 매우 매우 달랐습니다. 불쾌하거나 불편한 건 아니지만 이어지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와 이어질 수 있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 서로 택시를 잡는데 M의 택시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걸어가면 30분이라고 걸어간다고 해서 그녀를 보내고 저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꽤나 일찍 귀가한 편이라 사인방으로 들어갔더니 새로운 게스트들이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온 22살 친구들이었습니다. 또 진행병이 도져서 그녀들이 무안하지 않도록 말을 걸었습니다. 대충 짐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오니 또 거실에 도란도란 모여있더군요. 앉아서 S와 주로 얘기했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인데 참 밝고 귀엽습니다. 그 친구는 포트럭에 맘에 드는 남자가 있다며 그를 ‘원필’로 칭하고 제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주로 저 남자가 너무 맘에 든다, 말을 걸고 싶다, 죽을 것 같다 등이었습니다. 귀여운 S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담배를 사러 멀리 있는 편의점에 다녀왔습니다. 이상하게 입맛이 돌아서 빵과 우유도 사 먹었습니다.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에는 H와 전화를 하며 N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그와의 사이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돌아와 정리를 하고 있으니 N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곧 전화를 했는데, 제가 N에게 돌아오지 않는 관심에 대한 투정을 부린 것 같습니다. 내가 주는 만큼 무언가 마음이 돌아오지 않아 서운한 게 티 났을 겁니다. 그는 저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거지 N이 저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N이 할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얘기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여러 의미부여를 하다가 지쳐서 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많이 정리하며 잠에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