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 비비헤이뱃 모스크에서
[등장인물]
1. 알리 이븐 무사(Ali ibn Musa): 이슬람교 시아파의 8대 이맘
2. 오쿠마 카님(Okuma Khanim): 알리의 누이
3. 헤이뱃(Heybat): 오쿠마의 하인
4.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
5. 하얀 베일을 쓴 여인
6.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 아제르바이잔 前 대통령
7. 일함 알리예프(İlham Əliyev): 아제르바이잔 現 대통령
프롤로그 : 무함마드
632년 6월 8일,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가 슬하에 아들 없이, 후계자마저 지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후, 이제 칼리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원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후계자의 정통성과 혈통성을 주장하며,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 갈등을 시작했고, 전쟁과 암살의 역사가 이어졌다.
제1막 : 알리 이븐 무사 (Ali ibn Musa)
818년, 또 한 명의 칼리파가 쓰러졌다.
이슬람의 황금기를 이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는 고작 43살의 나이였지만, 이어지는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바그다드를 떠나 있던 중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공석이 된 칼리파의 자리, 그리고 두 명의 이복형제. 이슬람의 오랜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이것은 또 다른 전쟁과 혼란을 의미했다.
투쟁 끝에 형이었던 알 마문(al-Ma’mun)이 칼리파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반란을 잠재우는 데는 역시나 어려움을 겪는다.
알 마문은 시아파의 위협을 잠재우기 위해 시아파의 제8대 이맘, 알리 이븐 무사를 만나러 코라산(Khorasan)으로 간다. 알리는 선대 칼리파의 핍박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바그다드를 벗어나 있던 중이었다.
알 마문은 알리에게 왕세자의 자리를 제안한다. 무함마드의 혈족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시아파의 불만을 잠재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알리는 이를 거부한다.
알 마문은 다시 칼리파 후계자의 자리까지 제안하며, 심지어 아바스의 검은 깃발을 시아파의 초록색으로 바꾸도록 하는 명령까지 내리면서 알리를 설득해보지만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이러한 사실이 바그다드까지 퍼지자, 알 마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졌다. 이맘의 권위를 확인받은 시아파는 더욱 기세가 거세어졌으며, 자신의 수니파 진영에서는 칼리파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터져 나오며 그의 폐위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담감이 날로 커진 알 마문은, 알리를 독살한다.
제2막 : 오쿠마 카님 (Okuma Khanim)
알리는 코라산 근처의 한 마을에 묻혔다. 후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으면서, 이 곳은 ‘순교’를 뜻하는 마슈하드(Mashhad)로 이름이 바뀌고, 오늘날 시아파 무슬림 국가인 이란의 성지가 된다.
알리의 누이, 오쿠마 카님에게는 또 한 번의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남매의 아버지이자, 제7대 이맘이었던 무사 알카딤(Musa ibn Ja'far al-Kadhim) 역시 평생 동안 수차례의 감옥 생활과 고문에 시달렸으며, 마지막 투옥 중에 독살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쿠마는 세상의 피비린내를 피해 고요한 곳을 찾아 바그다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바쿠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 바닷가 언덕에 거처를 정했다. 동쪽으로 푸른 카스피해가 내려다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오쿠마는 그곳에서 성녀의 모습으로 여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마을 사람들은 작은 토굴 무덤을 만들어 그녀의 유해를 묻어주었다.
제3막 : 헤이뱃 (Heybat)
시간이 지나면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이 묻힌 장소에 대한 소문이 점차 퍼져나갔고, 오쿠마의 무덤을 찾아오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슬람의 현인인 셰이크(sheik)들이 모여들어 아예 마을을 만들면서, 나중에는 아예 지명이 셰이코보(Shikhovo)로 바뀔 정도였다.
사람들은 오쿠마의 무덤 위에 기도를 올리기 위한 방 하나짜리 작은 모스크를 세웠다.
사원에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그곳은 '오쿠마 카님의 사원’으로 이름 붙여지지 못한다.
대신 그녀의 충직한 하인이었던 헤이뱃(Heybat)의 이름을 빌려오는데, 그 앞에 ‘이모(aunt)’를 뜻하는 ‘비비(bibi)’를 덧붙여 비비-헤이뱃, ‘헤이뱃의 이모를 기리는 사원’이라 명명했다.
사원은 오랫동안 꾸준히 관리되고 증축되며 조금씩 규모가 커졌다. 20m 높이로 세워진 첨탑 위로 무아진(mu’adhdhin)이 올라가 하루 다섯 번 행해지는 예배(salat) 시간을 알리며 아잔(adhan)을 크게 낭송했고, 배를 타고 이 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언덕 아래 바닷가까지 40개의 계단도 놓였다.
1851년, 나폴레옹에 의해 벨기에로 추방당한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당시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었던 러시아로 탈출해 달아난다.
이후 바쿠에도 뒤마의 발길이 닿게 되는데, 그의 기록에 따라 이 사원은 ‘파티마(Fatima)의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진다.
제4막 : 스탈린
1920년 4월, 소비에트의 군대가 바쿠로 들이닥친다.
혁명과 군대에는 오일이 필요했다.
1922년, 마침내 스탈린이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이번 여행 내내 숱하게 등장하는 그 이름, 스탈린이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를 비평하면서, 마르크스가 “종교는 모든 인민의 아편”이라고 머리말을 놓은 이후, 공산주의 아래에서, 특히 스탈린의 지배 아래서 종교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1934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오쿠마 카님의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된다. 벽이 매우 두껍고 첨탑도 높아, 두 차례 폭파작업 끝에 사원을 해체할 수 있었다.
비비-헤이뱃 사원을 신호탄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수많은 종교시설들이 붉은 군대의 화약에 무너져 내렸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에는 2천 여개의 모스크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회, 카톨릭 성당, 유대교 시나고그, 심지어 아르메니아 정교회 교회까지 세워져 있었으나, 이 시기에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는 박물관 등으로 탈바꿈된다.
1980년대, 바쿠에 문을 연 모스크는 7개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를 통틀어도 11개 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다.
제5막 : 하얀 베일을 쓴 여인
이제 전설이 이야기될 차례다.
비비헤이뱃 사원이 폭파되고 이틀째 밤, 신성한 장소를 송두리째 빼앗긴 마을 사람들은 슬프고 분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그들의 귀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은 집을 빠져나와 소란의 진원지인 무너진 사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사원의 잔해를 지키고 있던 붉은 군대의 병사 하나가 충격에 빠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이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의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카스피해 속으로, 하얀 베일을 뒤집어쓴 한 여인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군인의 증언은 이러하다. 마치 누군가 들어서 옮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돌이 무너져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려서 나와보니, 잔해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작고 가느다란 형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앞을 지나쳐 갈 때, 군인은 장미의 향기를 맡았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전통에 따라 죽은 자의 손과 얼굴을 씻긴다는 그 장미물의 향기를 말이다.
일출의 빛에 가득 물든 수면 아래로 사라져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실 것이다! 더 좋은 날이 오면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다!”
이 이야기는 ‘숨은 이맘’이라는, 열두 이맘 가운데 마지막이자 모함마드의 혈통인 알 마흐디(al-Mahdi)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선대 11명의 이맘 모두 칼에 찔리거나 독살당한 후인 872년, 알 마흐디는 4살의 나이에 이맘의 자리에 오른 직후 그 종적을 감추었다. 시아파 신도들은 신께서 수니파의 박해와 위협으로부터 그의 목숨을 지켜주고 계시며, 언제고 때가 오면 다시 이 세상에 재림시킬 것이라 믿고 있다.
이야기는 그 이후로 조금 더 이어진다.
비비헤이뱃 사원을 폭파시킨 세 명의 병사들이 각각 익사, 낙석 충돌, 감전을 당하는 사고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물론 역시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확인 가능한 사실은 이러하다.
사원을 폭파시킨 그 해에, 소비에트 정부는 갑자기 입장을 선회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을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비비헤이뱃을 파괴한 죄를 물어 아즈콤스타리사 살라모프(Azkomstarisa Salamov) 위원장을 시베리아 유배 20년형에 처했다.
제6막 : 헤이다르 알리예프 (Heydər Əliyev)
1991년, 아제르바이잔이 소련에서 독립한다.
1993년, 군부 쿠데타로 제2대 대통령을 몰아낸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제3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다.
헤이다르의 강권적인 독재 통치는 이후 10년간 이어진다.
이미 1969년에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3년간 재임을 했던 바가 있으니, 실제 아제르바이잔이 그의 권력 아래 놓였던 기간은 10년보다 훨씬 길다.
1994년,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은 비비헤이뱃 사원의 복원을 명령한다.
사원이 무너진 그 자리에,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재건축하는 프로젝트였다. 제대로 된 청사진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폭파 직전 찍어둔 사진들과 여행 방문객들의 기록, 1925년에 쓰인 기사를 참고해야만 했다.
1997년,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참석한 가운데 사원의 봉헌식이 열린다.
1999년, 비비헤이뱃 모스크의 개관식이 개최되었다.
하얀 베일을 쓴 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7막 : 일함 알리예프 (İlham Əliyev)
200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병을 앓게 된다.
2003년 10월,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국영 석유회사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어 재직 중이던 자신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를 신아제르바이잔당 단독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2003년 10월 15일, 일함 알리예프가 76.8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아제르바이잔의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2003년 10월 31일, 일함 알리예프가 대통령직에 취임한다.
동시에 그의 아버지가 뜯어고친 헌법이 발효되어,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이 사라진다.
2003년 12월 12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전 대통령이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사망한다.
2005년 5월, 카스피해와 지중해를 잇는 세계 최장의 송유관이 완성된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조지아 트빌리시-터키 세이한(Baku-Tbilisi-Ceyhan)으로 이어지는 BTC 라인을 통해 하루 100만 배럴의 석유를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개통식에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터키, 카자흐스탄의 대통령들을 비롯해, 미국 에너지부 장관, 영국 석유회사 BP의 사장이 참석했다. 기존의 송유관을 빼앗긴 러시아 측에서는 끝내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제르바이잔의 국내총생산은 (2009년을 제외하고) 10년간 가파르게 상승한다.
같은 해,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령에 따라 비비헤이벳 사원이 현대적으로 증축을 시작한다.
2008년 7월 12일, 대통령 일가가 공사가 끝난 비비헤이뱃 사원을 둘러본 후, 일함 알리예프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의 제막식을 가진다.
2008년 10월 15일, 일함 알리예프가 대통령직 연임에 성공한다.
약 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3년 10월 9일, 다시 일함 알리예프가 85%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한다.
2013년 10월 16일, 아제르바이잔 검찰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선거감시단체, '선거감시와 민주주의 연구 센터(EMDS)’의 대표를 탈세 혐의로 체포한다.
다만 이 선거는 부정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유럽안보협력기구, 유럽의회, 유럽평의회의원연맹, 독립국가연합, 이슬람협력기구, 흑해경제협력체, 아시아정당국제회의 등에서 1,300여 명의 국제 참관인을 불러와서 치른 상태였다.
2015년, 유가가 하락하면서 국내총생산이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내려앉는다.
2016년, 일함 알리예프는 개헌을 단행한다.
이로써 대통령의 임기는 5년에서 7년으로 늘어났고,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이 주어졌으며, 새롭게 부통령직 두 자리가 신설되었다.
또한, 대통령 피선거권 최소 연령 35세 규정이 폐기된다.
일함 알리예프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그의 장녀 레일라 알리예바는 1985년생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2018년에도 35살에 미치지 못하는 나이였다.
2017년 2월 21일, 수석 부통령직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안과의사 출신인 자신의 아내, 메흐리반 알리예프를 임명한다.
2018년 4월, 일함 알리예프는 10월에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 선거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반년 앞당겨 실시한다.
그는 86.02%의 득표율로 4선에 성공한다.
이제 그의 임기는 2025년까지이다.
대통령과 일가 및 측근의 부정부패, 언론매체와 NGO 탄압 및 언론인 구속, 야당 인사 투옥 등의 항목은 지면이 부족할 듯하여 위 연대표에서 생략하였다.
에필로그 : 다시 비비헤이뱃 사원
2018년 10월 22일,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바쿠에서 서쪽으로 160km가량 떨어진 이미슐리(İmişli)시를 방문한다.
그는 가장 먼저 도시의 중앙에 놓인 자신의 아버지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동상에 헌화를 했다.
이후 아라즈 강 운하, 지역 고속도로 두 곳, 아제르쉬그 합자회사 자동관제센터, 국기 박물관, 고아원, 대통령 직속기관인 ‘공공 서비스 및 사회혁신 기관’(ASAN) 개관식에 참석하며, 모두 일곱 번의 리본 커팅 세리머니를 치른다.
같은 날 오후 2시, 아내와 나를 태운 자동차가 비비헤이뱃 사원 앞에 도착한다.
차가 멈추자 경찰들이 다가와 가이드와 대화를 나눈다. 눈치를 보아하니 사원 앞에 차를 주정차할 수 없다는 것 같다.
잠시 후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이 사원 앞의 도로를 지나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이미슐리에서 자동차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유러피언 루트 119번(E119)을 따라 바쿠 남쪽을 지나야 한다.
그러고 보니 도로는 벌써부터 봉쇄되어 반대편으로는 달려오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운전기사가 노련함을 발휘해 사원 아래, 좁은 부둣가의 골목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리고 낡은 조선소 뒷마당의 살풍경 속을 지나 사원 뒤편의 좁은 오르막 골목에 차를 숨기는 데 성공했다.
사원의 외관은 단출하다. 인근에서 나오는 석회암으로 외벽을 쌓아 올려 딱히 존재감을 뽐내지 않고 누런 뒷산의 풍경 속에 포근히 담겨 있다.
다른 모스크에 비해 다소 작아 보이는 돔 세 개가 얹혔고, 양쪽으로 우뚝 솟은 좌우대칭의 미나렛과 그 사이의 창이 높고 장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반듯한 외벽이 긴장감 없이 놓여있다.
그러니 다른 유명 모스크가 보여주는 이슬람 건축의 황홀미는 밖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 이 사원을 새롭게 디자인한 사난 술타노프(Sanan Sultanov)가 구 소련에서 건축을 공부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마치 표면이 투박한 광물 덩어리를 쪼개자 그 속에서 눈부신 보석의 원석을 드러나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붉은빛 카펫을 따라 들어가면 남녀로 구분되는 양쪽의 기도실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쳐야 하는 중앙 홀이 먼저 나오는데, 온통 에메랄드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천장과 벽면에 꾸란의 말씀들이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다.
칠각형으로 열린 천장 위로 동그란 돔의 모양의 보이고, 벽면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스며든 색색의 빛은 고요한 사원 안을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묘소 하나가 놓여있다. 오쿠마 카님이 누워있는 곳이다.
오후 2시 13분,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을 태운 자동차와 그 일행들이 비비헤이뱃 사원 앞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2시 15분, 어딘가에 숨어있던 자동차들이 봉쇄가 해제된 도로로 쏟아져 나오면서, 아제르바이잔과 유럽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에는 극심한 정체가 시작되었다.
사원의 안뜰 난간에 기대어 카스피해를 내려다본다. 항만시설이 건설되면서 바다는 사원과 조금 더 멀어진 듯하다. 언덕 아래 얼룩덜룩 기름때와 녹가루를 뒤집어쓴 조선소에 배 몇 척이 정박해 있고, 무언가를 들어 올리려 용을 쓰는 크레인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 차경으로 오일을 뽑아 올리는 펌프들이 꽂혀있고, 더 멀리로는 바쿠의 최신 고층 빌딩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이 드러난다.
내륙호의 옴폭한 만에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게 바닷물이 고여있다.
물 밖으로 누군가 머리를 내밀고 걸어 나온 물자국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