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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져가는 면책 쿠폰

(감사에서 살아남기)(27)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088294059



<낡아져가는 면책 쿠폰>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국민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창의’, ‘창조’, ‘규제개혁’, ‘혁신’ 등 여러 말로 불렸다. ‘국민의 지팡이’, ‘탁상행정’, ‘소극행정’이란 단어을 뉴스에서 자주 보였으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스스르 잊혀져 갔다. 요즘 이 빈자리에 ‘적극행정’이란 단어가 올라 앉았다. ‘적극행정’이 단어가 없는 정부 매뉴얼을 찾기 어렵다.


적극행정을 하면 인사평가에 가점을 주고, 특별승진의 기회도 준다. 사후에 위법사유가 발견되어도 ‘적극행정 면책’이라는 쿠폰을 받는다.


적극행정을 위하여 사전에 감사관실에 질의하면 ‘사전컨설팅 면책’이라는 쿠폰도 받는다. 사전컨설팅 제도의 목적은 사업부서 공무원이 느끼는 감사불안을 해소시켜 적극행정을 활성화하려는 것이다.(적극행정운영규정 제5조) 일상감사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일상감사를 신청할 수 있으니(신청에 의한 일상감사, 공감법시행령 제13조의2), 사전컨설팅의 구조와 내용은 일상감사와 유사하다. 사전컨설팅 사례를 살펴보아도 대부분 일상감사 대상인 계약, 인가, 허가, 예산과 관련된 내용이다. 감사관실의 일상감사와 사전컨설팅 업무담당자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


‘사전컨설팅’은 2019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현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전컨설팅은 컨설팅이다. 자기보다 조금이나마 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실 직원은 해당업무의 전문가가 아니다. 해당업무에 관해서는 사업부서가 가장 전문가다. 심지어 감사업무의 전문가라고 보기도 어렵다. 순환보직으로 감사실에 근무하게 된 평범한 공무원일 뿐이다. 담당자, 팀장, 과장, 국장의 결재를 받았다는 얘기는 사업국의 전문성이 모두 고려되었다는 얘기다. 감사실 직원보다 업무적 지식, 경험, 권위 모두 우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컨설팅은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컨설팅을 의뢰하는 사람들도 전문지식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전문의견 수렴방법에는 소관부처 유권해석, 법무질의, 예산실의 예산·계약에 대한 판단, 적극행정심의위원회, 전문가 자문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전컨설팅을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뢰부서는 ‘사전컨설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전컨설팅을 마치면 얻어지는 ‘면책쿠폰’을 원하는 것이다. 법무질의하는 경우 두루뭉술하게 답변하거나 법무법인의 다양한 의견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면책’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예산부서에 질의한다면 예산회계실무기준 보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할 것이다. ‘적극행정심의위원회’에 회부할 수도 있는데 심의자료를 작성하고 자신의 의견도 제시해야하는 등 ‘면책’에 있어 여전히 부담스러운 제도이다.


‘면책’ 이외에도 다양한 목적이 있을 수 있다. 업무추진에 부담을 느끼는 사업부서가 부정적 사전컨설팅을 받아 업무포기의 근거로 사용할 수도 있고, 사전컨설팅 받으며 시간을 벌어보려할 수도 있고, 법무의견이 부정적으로 나왔는데 긍정적 컨설팅 의견을 받아 추진하려고도 할 수 있다. 사전컨설팅을 일단 받아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사업부서 직원들이 감사불안을 느끼듯이, 감사실 직원들 역시 사전컨설팅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마 감사원도 그런 모양인데, 감사원 업무매뉴얼을 보면 ‘사전컨설팅 제한사항’을 구체적을 나열하고 있다.


1. 사실관계확정에 사항

1. 관계 법령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경우

1. 단순 민원 해소

1. 소극행정/책임 회피 수단으로 컨설팅을 이용하고자 하는 경우

1. 충분히 검토를 거치지 않은 경우

1. 이미 행해진 처분의 위법부당여부에 대해 확인을 구하는 경우

1. 신청사항 관련 수사,소송, 행정심판 및 감사가 진행중이거나 확정된 경우


이 정도면 이를 뚫고 사전컨설팅 접수에 성공하기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무엇이든 반려할 수 있도록 규정된 것이다. 감사원도 사전컨설팅이 대부분 다른 제도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안이고, 사전컨설팅의 많은 부분이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여러 제도가 있음에도 굳이 사전컨설팅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전컨설팅 의견서를 작성하여 윗사람의 결재까지 받아가며 질의한다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의 책임이 발생할 수 있는 업무라는 것이다.


법령해석 업무를 하였을 때 후배가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님. 법령에 다 써있는데 이런 간단한 거를 왜 물어볼까요.’

‘그 사람들 바보아냐. 간단하고 책임질 일 없으면 그냥하지. 품들고 시간드는데 질의서까지 만들어서 결재받아 보냈잖아. 그럼 뭔가 있는거야. 깔려 있는 의도가 있고, 제출되지 않은 자료가 있을 수도 있지. 그들도 뭔가 찜찜한데 콕 집어 뭐가 문제인지 모를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위험이 있다는 거야. 질의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검토한다는 뜻이야’


당신이 업무담당자인데 책임이 발생할 것 같은 업무이거나, 위법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사전컨설팅을 의뢰하라. 국장님 과장님 설득에 실패했다면 우선 사전컨설팅을 의뢰하자고 건의해보자. 사업부서가 원하는 방향의 컨설팅 결과를 받는다면 후에 면책을 받으니 그걸로 좋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와도 컨설팅일 뿐이니 따를 의무는 없으니까 손해볼 건 없다. 그렇지만 감사관들도 만만치 않으니 감사실에 접수되도록 준비를 잘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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