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서 살아남기)(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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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시대다. 을이 없는 갑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 갑을이란 단어에는 긴장감이 있다. 갑은 갑의 입장이 있으며, 을은 을의 입장이 있을 뿐이다. 갑을의 긴장감은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조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갑질이란 단어는 2010년대 들어서 나타나더니, 이제는 어느 사건하나 갑질개념이 깔리지 않는 사건이 없다. 직장내 언행이 갑질이냐 아니냐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이제 여차하면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을은 여전히 도처의 갑질에 힘겹고, 갑은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을의 매복에 긴장하고 있다.
갑질 사건은 감사실의 입장에서도 감사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다. 보통의 감사는 감사받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으로 양분된다. 감사를 받는 조직의 구성원은 모두 같은 편이다. 그런데 갑질 사건은 진영이 4등분 된다. 신고한 사람, 가해자, 피해자, 기관장으로 나눠볼 수 있다. 감사관은 4분면을 만족할 수 있는 감사결과를 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감사관은 여기저기 요구사항 맞추다 모두에게 아쉬운 감사결과를 내기 십상이다.
갑질사건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시작된다.
피해자 신고, 단체신고, 연명신고, 제3자 신고 등 여러 방식으로 갑질신고가 된다. 단체신고, 연명신고, 제3자신고 등은 피해자의 의사 이외에 신고자의 의사도 고려해야 하는데, 신고인들은 피해회복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정의론에 빠지기 쉽다. 그만큼 감사는 어려워진다. 특히 제3자의 신고가 진행되는 경우에 제3자는 정의론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절차의 부담을 오랫동안 지게 되며, 그 시간만큼 2차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갑질은 태생적으로 스스로 알기 어렵다. 누구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웃는 얼굴로 갑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해왔고, 변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라 갑은 과거의 기준으로 살아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갑의 권한은 변해간다.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갑은 자신의 권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기 어렵다. 물방울 안에서는 물방울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역으로 을은 과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재의 부서원’이기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는 통하지 않는다.
을도 처음에는 갑질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업무지시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따라가려고 한다. 설령 갑질이라고 생각해도 신고하기 어렵다. 갑은 을을 평가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차고 넘친다. 근무평가, 성과평가로 불이익을 줄 수도 있고, 업무배정, 보직이동에 사실상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평판을 만들고 다닐 수도 있다. 업무지시와 갑질의 회색지대는 넓고도 넓기 때문에 을은 그냥, 그저 그렇게 넘어간다.
그런데도 갑질로 신고되는 사건은 급증하고 있다. 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언제 신고하게 되는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한다. 업무지시만으로 갑질 신고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지시 불필요하게 빡빡해도 일반적으로 신고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인간적인 상처가 동반되는 경우에 신고한다.
업무경력, 근무평정, 성과평가, 나이, 학력 등을 들먹이며 업무지시를 할 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글이나 문자로, 혹은 동료가 있는 장소에서 질책할 때 상처는 더 깊어진다. 카카오톡이나 문자로 질책하면 누구라도 곰곰이 읽게 된다. 여러번 읽으면 상상하게 되고, 상상하다보면 자괴감이 든다. 마음이 상하고, 따뜻한 답글이 쓰여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더 강도 높은 갑의 질책성 문자가 더해진다. 감정의 골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참아왔던 업무적 갑질 상처에 인간적인 마음의 상처가 더해지면 갑질은 사건이 된다.
풍선에 바람을 불고 또 불면 결국 터진다. 모든 것은 임계점에 도달하면 본질이 변화한다. 갑질의 임계점은 인간적 마음의 상처다. 결국 펑- 하고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