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서 살아남기)(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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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서 ‘환상의 빛’>
비위를 저질렀다면 반성하는 것이 좋겠으나, 반성해야 할 법적인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다.
감사처분을 결정할 때, 징계양정을 정할 때, 형을 정할 때 반성의 정도를 고려하여 문책수위를 정한다. 공무원 징계령 시행규칙은 ‘뉘우치는 정도’, 형법은 ‘뉘우치는 정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뉘우치지 않으면 중하게 문책받는다. 비위자로서는 양심은 양심대로 지키면서 뉘우치는 빛을 보여야 한다.
뉘우침과 자백은 다른 것이다. 자백은 비위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횡령은 부인하면서도, 관례대로 처리한 것을 뉘우칠 수 있다. 역으로 자백하면서도 그건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호기를 부릴 수도 있다.
비위자에게 감사절차는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비위자에게 감사는 공세의 시간이 아니라 방어의 시간이다. 비위자에게 감사절차에서의 목표는 처벌받지 않거나 선처를 받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감사의 규칙대로 참여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러니 뉘우치는 빛을 보여야 한다. 정확히는 감사관이 ‘뉘우치는 빛’이 있다고 글로 쓸 수 있도록 대응해야 한다.
감사관이나 징계위원이나 ‘뉘우치는 빛’ 보다는 자백을 원할 것이다. ‘뉘우치는 빛’은 자백의 다음 단계니까. 자백을 하면서 난 당당하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대부분의 사건에서 ‘자백’이 곧 ‘뉘우치는 빛’이다. 비위자가 자백했다면, 조서 작성때 깊이 반성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킬 것이고, 피해자가 문책을 원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제출하면 감사관으로서는 더 할 것이 없다. 이 정도면 조사는 거의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감사관, 징계위원, 경찰, 검사, 판사 모두 꼼꼼히 읽는 것이 있다. 문답서와 조서다. 다른 것 발췌로 읽어도 조서만은 꼼꼼히 읽는다. 조사를 받을 때 반성여부를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깊이 반성한다고 조금 길게 이야기하면 좋겠다. 감사관이 요약해서 답변을 짧게 정리하면 원래 말한대로 써달라고 하는 것도 좋겠다. 나중에 반성문 수십 장을 내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가끔 형사사건에서 반성문을 수십 장 내는 경우가 있는데, 범죄사실과 관련성이 없이 뉘우치는 이야기만 수십 장이 있는 문서를 누가 꼼꼼히 읽겠는가. 물론 써내면 변호인은 폼 나게 제출하니 좋고, 기록에 묶여 있으니 뿌듯하고, 결정문이나 판결문에도 반성했다고 쓰여있겠지만 반성문이 판단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겠는가. 이미 조서에서 반성한다고 했을 것 아닌가. 정말 반성문을 내고 싶다면 한 번이면 충분하다.
조사받을 때 진술이나, 반성문 제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뉘우치는 빛’을 감사관, 징계위원, 검사, 판사에게 직접 보이는 것이다. 조사받을 때,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여, 재판정에서 ‘뉘우치는 빛’을 보여야 한다.
자백과 뉘우침은 전혀 별개라고 주장하며, 뉘우치지만 비위사실을 다투는 경우가 있다. 비위사실의 일부가, 비위의 경과가 사실에 맞지 않다고 다투는 것이다. 논리는 논리일 뿐이다. 비위사실을 시시콜콜 따지면 뉘우치는 빛이 없어보인다. 이럴 때는 변호사가 다투게 하는 게 좋다. 비위자는 모든 사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여 반성하지만, 변호사가 비위사실에 대해 법리적으로 다투는 것이라고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뉘우침의 빛’을 외부에서 알게 해야 한다. 비위자가 눈물이라도 흘려주면 변호사는 고마워할 것이다. 침통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어야 한다. 너무 억울해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여기까지 끌려온 자신을 불쌍히라도 여겨야한다. 뉘우쳐지지는 않더라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후회되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 감사에서 ‘환상의 빛’은 ‘뉘우침의 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