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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l 28. 2021

‘잘 모를텐데 말이지’ vs. ‘난 안 궁금한 데'

(공무원 생태학)(fiction)

책상 앞에 아크릴 명패에 누래진 ‘위원’이라는 종이가 끼워져 있다. 이 자리에 앉다니! 슬프다. 퇴직하는 날에는 약간 서운했다면, 이 자리는 씁쓸하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원로원 같은 ‘평가위원’ 자리다. 내가 현직일 때 위원들의 왕년 무용담을 들으며 참 안됐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건너편 책상에 말끔히 앉아있는 과장들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퇴직공무원의 약발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으니 씁쓸한 자리라도 나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책상사이에 거리가 조금 있지만 평가위원들과 과장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신변잡기와 덕담은 금새 밑천을 드러냈고, 조용해지더니 모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평가위원이 새로 도착하면 서로 다대다 함수로 명함을 교환했다. 그리고 다시 좀전의 순환이 이어졌다.



저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할는지 보이는 듯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그들이었을 때 평가위원들은 답답하고 한심해 보였었다. ‘라떼는 말이야’의 화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때의 그들과 확실히 다른데, 지금의 과장들은 나를 그때의 그들처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대 밖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완전히 밖으로 밀려나 희미한 연결고리마저 사라지겠지.



자료를 꼼꼼히 읽었어야지만, 집 프린터는 고장났고, 노트북으로 PDF파일을 읽어야만 했다. 나이 들어 수십 쪽을 노트북으로 본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슬렁슬렁 읽었다. 읽어보니 다 뻔한 말이이서 마치 내가 예전에 쓴 문서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뭐 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뭐 과장들이 잘 설명하지 않겠는가.



시간이 되자 간사는 위원 한 분은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는 말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과장들이 차례로 발표했다. 지난해의 성과, 착안점, 향후 계획 같은 걸 보고했다. 의례 해왔던 일들을 대단한 일인양 설명했다. 기존에 했던 일을 대통령님의 국정철학에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이렇게 저렇게 가위질하고 풀을 붙였다. 그 일은 대통령이 몇 번을 바뀌어도 계속되어왔고, 계속될 일이었다.



사실 우리 평가위원들에게 보고하려고 새로운 일을 창조했겠는가. 그들이 바본가. 그런 생색나고 폼나는 일이라면 국실장이나 장차관님에게 먼저 보고했겠지. 보도자료를 기자단에 뿌렸겠지. 나도 그걸 알고, 그들도 내가 안다는 걸 안다. 결국 평가회의도 하라니까 하는 거다. 이 회의에서 어떤 조언과 자문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과장은 없다. 이것마저도 서로 안다.



회의는 금새 무기력해지고 나른해졌다. 갑자기 회의장 문이 열리더니 땀을 닦으며 평가위원 한 분이 들어왔다. 과장들은 다시 명함을 들고 위원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고, 회의장은 이내 활력을 찾았다. 시원한 생수 한 병을 들이킨 교수님은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교수님의 몸은 뒤로 기울었고, 무게는 오른쪽 팔걸이에 기대있었다. 그러더니 영어를 섞어가며 행정학 여러 이론들을 늘어놓는다. 모든 문장에 ‘너희들은 잘 모를텐데 말이지’라는 것이 생략되어 있는 말투였다. 과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난 안 궁금한데’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교수님은 아무래도 올해 처음 평가위원이 되셨나보다.



과장들은 자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회의가 필요하고, 회의를 했다는 보고서가 필요한 것이다. 잘 조율된,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추임새가 있는 그런 회의와 보고서가 필요한 것이다. 회의장소도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진이 잘 나올 곳을 골라야 한다. 회의실무의 기본이다.



평가위원들이 돌아가며 얘기를 하고, 과장들은 현명한 의견 감사하다고 답했다. 간사는 위원님들의 의견에 따라 후속조치를 할 것이며 다음 회의 때 보고드리겠다고 다짐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며 과장들과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이야기를 했다. 몇 년 있으면 이 회의에 내 후배가 초대될 것이고, 나는 이마저도 밀려날 것이다. 그때가 공무원 가동연한의 끝이겠지.



다 됐고! 평가위원 수당 입금되면 아내와 맛있는 것 먹으러 가야지.





https://blog.naver.com/pyowa/2224479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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