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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ug 31. 2020

갑을관계론 (갑은 공격하고, 을은 매복한다.)


'갑을'(갑옷甲  새乙)은  한자 뜻과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단어이지만, 갑옷과 새의 관계라고 볼 수 있겠네요.



'갑질’의 시대다.


'갑질'은 비위사건 처리에서 가장 편리한 개념이다. 무슨 규정을 위반했는지, 비위건명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다. 그저 '이것은 갑질이다'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사건은 시작된다. 그래서 이런 개념은 이전엔 없었다.갑질이란 단어는 2010년대 들어서 나타나더니, 이제는 어느 사건하나 갑질개념이 깔리지 않는 사건이 없게 되었다. 직장내 언행이 갑질이냐 아니냐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이제 여차하면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을은 여전히 도처의 갑질에 힘겹고, 갑은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을의 매복에 긴장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기록에서 갑甲, 을乙을 처음 봤다. 벌써 20년 전이다. 원고는 甲, 피고는 乙, 참고인은 A, B, C 였다.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기록상으로 갑과 을은 쌍무계약이기 때문에 대등당사자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기록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은 금새 알 수 있었다. 甲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세상은 甲과 乙의 물고 물리는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구박을 받는 공무원도 지역구 의원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지역구민입니다.' 한마디에 시원한 커피를 얻어 마실 수 있는 것이 갑과 을의 세계다.


갑질은 태생적으로 스스로 알기 어렵다. 누구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웃는 얼굴로 갑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해왔고, 변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라 갑은 과거의 기준으로 부서를 이끈다. 갑은 자신의 권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기 어렵다. 물방울 안에서는 물방울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을도 처음에는 갑질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업무지시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따라가려고 한다. 설령 갑질이라고 생각해도 신고하기 어렵다. 갑은 을을 평가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차고 넘친다. 근무평가, 성과평가로 불이익을 줄 수도 있고, 업무배정, 보직이동에 사실상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평판을 만들고 다닐 수도 있다. 업무지시와 갑질의 회색지대에 있는 많은 조치가 그냥, 그저 그렇게 넘어간다.


그런데도 갑질로 신고되는 사건은 있다. 점점 늘어난다. 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언제 신고하게 되는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한다. 업무지시만으로 갑질 신고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지시 불필요하게 빡빡해도 일반적으로 신고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인간적인 상처가 동반되는 경우에 신고한다. 업무경력, 근무평정, 성과평가, 나이, 학력 등을 들먹이며 업무지시를 할 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글이나 문자로, 혹은 동료가 있는 장소에서 질책할 때 상처는 더 깊어진다. 카카오톡이나 문자로 질책하면 누구라도 곰곰이 읽게 된다. 여러번 읽으면 상상하게 되고, 상상하다보면 자괴감이 든다. 마음이 상하고, 따뜻한 답글이 쓰여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더 강도 높은 갑의 질책성 문자가 더해진다. 감정의 골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참아왔던 업무적 갑질 상처에 인간적인 마음의 상처가 더해지면 갑질은 사건이 된다. 풍선에 바람을 불고 또 불면 결국 터진다. 모든 것은 임계점에 도달하면 본질이 변화한다. 갑질의 임계점은 인간적 마음의 상처다. 결국 펑- 하고 터진다. 을은 과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재의 부서원’이기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는 통하지 않는다.


갑질로 신고되면, 갑은 신고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명적이다. 그 앞에 무수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고, 그 절차만으로도 그동안 쌓아왔던 업무성과나 평판은 모래바람처럼 날아가버린다. 갑은 언제나 자신에게 밝은 얼굴로, 을의 자세로 근무했었던 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신고했다니, 갑은 아마도 매복에 걸린 정찰병처럼 속수무책일 것이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갑질은 왜 일어날까. 보통은 사람을 바꾸려 할 때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을 바꾸려 하지마라. 경험해보니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갑에게는 누구의 인성을 바꿀 권한이 없다. 갑이 뭐라고 다른 사람의 인성을 바꾼단 말인가. 갑에게는 그저 업무지시, 평가권이 있을 뿐이다. 그저 업무지시하고 평가하면 된다.


을의 기본이 안 지켰다고 생각했을 때 버럭하며 갑질을 한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갑의 기준일 뿐이다. 물론 처음에는 작은 버럭이었을 것인데 을과 신경전을 벌이다 을이 갑의 지위를 끝내 인정하지 않으면 갑은 궁극의 갑은 자신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버럭한다. 결국 버럭만 남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을의 기본’은 겨우 자신의 기준일 뿐이다.


그렇게 을은 신고한다. 을로서 신고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조사기관이 을을 대리해서 조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신고는 사건을 인지한 단서에 불과하다. 조사기관은 사건을 인지하고, 양측의 충분한 소명을 듣고, 관련 진술을 청취하고 증거를 모아 실체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임무다.


조사를 하면 갑은 을의 진술이 과장되었거나 앞뒤 맥락이 다 생략되어 억울하다고 소명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신고한 을은 과장된 진술을 하는 경우가 많고,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탓하지 말라. 누구나 그렇게 된다. 상대방이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불리한 사실은 말하기 싫은 것이 모든 사람의 본능이고, 실제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 조사하면서 사건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가는 요인중의 하나는 을이 자신에게 하지 않은 일을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제3자에게 한 가해행위를 신고하는 것이다. 제3자는 졸지에 사건에 빨려들고, 그것도 관련사건으로 조사받을 수 있다. 결국 갑질사건은 종국에는 감적적 긴장상태가 궁극의 단계에 까지 치달아 평소에 문제 없던 일이 쟁점이 되기도 한다. 갑은 을을 불러놓고 호통치거나,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부서원들을 모아 놓고 을이 허위 과잉진술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2차 가해라는 추가적인 사실까지 누적되게 된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몰래녹음도 자주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앞뒤 모두 잘려나가고 말만 남게 된다.


기준에 따르면 갑질은 크고 작은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20년 넘은 공직기간 동안 나도 누구에겐가 갑질을 했을 것이다. 그땐 다들 그랬었다고 얘기한다한들 갑질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문제로 삼지 않은 덕택에 무사히 지나온 것이다.


그동안 많은 선배님들이 퇴사했다. 표현만 다를 뿐, 퇴사하는 선배님들의 말씀은 항상 같았다.

‘대과 없이 공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한, 했을지도 모른, 모든 실수에 대해 용서를 바랍니다.’


똑똑하신 분들인데 왜 저런 틀에 박힌 표현을 반복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퇴사하면서 나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 자리에 서 보면 안다. 그건 틀에 박힌 표현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단 몇 분의 시간동안, 나를 따뜻하게 봐주며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는 내 앞에 서 있는 후배들에게 해 줄수 있는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207665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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