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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ug 29. 2021

그녀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공무원 생태학(fiction)

컨베이어벨트다.


언제나처럼 식판을 들고 다음 반찬으로 한 칸씩 한 칸씩 밀려간 후 ‘띵동’하고 4000원을 결재한다. 과원들과 모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는다. 코로나로 한 칸씩 건너 앉아야 한다. 그나마도 투명아크릴로 가려있다. 스마트폰과 함께 밥을 먹는다. 밥알을 씹으며 투명 아크릴을 통해 보이는 구내식당의 장관을 본다. 모두 ‘냠냠냠’하며 무아적으로 밥을 먹고 있다.


나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갑자기 멈춘다.

‘어디서 봤을까?’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모르겠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잔주름과 푸석한 머릿결, 공무원스러운 옷차림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스마트폰에 눈을 꼽고 ‘냠냠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밥을 다 먹고 퇴식구에 다시 줄서고, 밀려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에 걸어오면서도 그녀의 인상이 잔상처럼 남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청사에 낯익은 공무원이 있을 리 없는데 누구일까. 오후가 시작되자 내 머릿속에 있던 궁금증은 곧 사라졌고 다시 까마득히 잊혀졌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그녀가 내 건너편 책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여전히 스마트폰과 식판 사이로 눈길을 오가며 ‘냠냠냠’ 먹고 있었다. 나는 힐끗힐끗 그녀는 봤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으니 그녀가 누구였던지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인생을 돌아보며 그녀가 등장했던 곳의 좌표를 찾아보았다. 어딜까? 그저 닮은 사람은 아닐까? 닮았다면 누구의 닮은 얼굴일까? 그렇게 밥을 먹었다. 조금은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티슈 몇 장을 뽑더니 입을 닦고 스마트폰을 작은 손가방에 집어넣었다.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내 옆으로 지나갔다. 키는 조금 작았고,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 눈만 보였다.


식판을 반납하고 건물밖으로 나왔다. 시위용 확성기 소리가 거슬렸지만 천변을 걷기에 좋았다. 생각이 났다. 무려 20년 전 도서관에 봤던 얼굴이다. 서로 이야기 한 번 해보지 않은 그냥 도서관에서 얼굴만 아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중년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복학했던 나는 왠지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도서관에는 느즈막히 왔다. 그러면서도 공부가 잘 될 것 같은 책상을 찾았다. 그러다 한 곳에 정착했는데 열람실 한가운데 기둥옆 자리였다. 어떻게든 그 책상에 앉았다. 메뚜기처럼 퍼덕거리면서 앉기도 하고, 맡아 놓은 자리를 사마귀처럼 빼앗아 앉기도 했다. 무슨 징크스가 있는것처럼 그 책상에 집착했다. 언제나 일찍오는지 도서관에 도착하면 그녀는 언제나 그 책상 모서리 자리에서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게되면 사람들이 뭐 공부하는 지 저절로 알게 된다. 무슨학과 몇 학번인지, 무슨 시험을 준비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녀는 행시 2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객관식 1차 공부하는 나는 2차 연습답안지 논술을 써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그 책상에서 3년을 공부했다. ‘1차라도 합격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되었다. 어떻게 공부하냐고?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냐고? 그런 건 없었다. 계획대로 그저 매일매일 진도에 맞춰 공부했다. 느즈막이 도서관에 가서 지하철 끊기기 전에 도서관을 나오면 뿌듯하고 상쾌했다. 청춘이었으니 가끔은 술도 마시고 설레이기도 했었다.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는 2차 시험일이 지나자 더 이상 도서관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합격을 기원했다. ‘꼭 합격하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겨울 그녀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도서관에 나타났다. 다시 객관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긴 했지만 안타까웠다. 나도 내년 봄에 있을 1차 시험 준비에 마음은 급했다. 그녀도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겠지. 내가 가진 모든 책에는 이름, 학번, 과명이 써 있었으니까. 내 문제집을 보면서 무슨 공부를 하는 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다음 해 1차 시험에도 떨어졌다. 그렇게 한 책상에서 공부한 시간이 1년이 넘었다. 누구인지는 알지만, 여전히 모르는 사이였다.


그녀는 학교 여기저기서 자주 보였다. 학생식당에서, 도서관 매점에서, 도서관 밖 벤치에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띠였다. 나도 그녀의 눈에 띠었을런지는 모르겠다. 학생식당에는 꿈과 짐을 같이 짊어진 나 같은 학생들도 가득했다. 학교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합격 플랭카드를 보면서 불안함을 넘어 설 힘을 얻었다. 떨어졌을 땐 급격히 좌절했다. 어느 날 쓸쓸히 떠나는 사람들의 인사는 나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고, 도서관에서 중년을 맞이하는 선배들을 보면 덜컥 겁이났다. 그렇게 우리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책상, 같은 공간에서 청춘을 소모하고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내렸는데 도서관의 그녀가 밖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줄 서 있었는데, 내리는 나에게 인사를 했다. 짧은 목인사에 나도 목인사를 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 인사에 깜짝 놀란 듯 했고, 나도 인사를 하긴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그녀는 지하철을 떠났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다시 같은 책상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나는 그 책상에서 3년을 공부했고, 그녀도 그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나는 도서관을 떠날 수 있었다. 떠나왔으므로 그녀가 언제까지 공부했는지는 모른다. 그녀의 청춘이 언제까지 도서관에 붙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원래 준비했었던 행정고시를 합격했는지, 7급이나 9급시험이 되었을런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 정부청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40대 후반의 공무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도 다행히 청춘 전부를 붙잡히지 않고 도서관에서 떠날 수 있었구나. 다행이다.


그녀가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이십 대의 그녀를 떠올려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막연한 느낌뿐. 중년이 끝나면 정년퇴직을 하겠지. 10년쯤 남았구나. 그녀도, 나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고, 매점에서 아이스라떼를 마시며 마지막 중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식당, 같은 매점에서 시험공부를 했고, 공무원이 되어 같은 공간, 같은 식당, 같은 매점에서 조금씩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소설같다.


그녀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2488148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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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생태학(fiction)


1. 그녀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 바통은 나까지만, 너는 경기를 끝내

1. 창가에 도착하면 어느새 중년이 된다.

1. 악당릴레이

1. 다 쓸 수도,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1. ‘너희들은 잘 모를텐데 말이지’ vs. ‘난 안 궁금한데’

1. 엄벌하라는 말

1. 긴장하자. 어느 곳에서 자백을 낚아챌는지 모르니

1. 어디선가 쓸쓸히 늙어가고 있을 매뉴얼의 일대기

1. 만다라처럼 사라지는 것

1.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

1. 물고 물리는 관계

1. 복지부동은 아트다.

1. 공무원이 제일 원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것

1. 공무원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1. 공무원이 제일 공들이는 것

1. 공무원이 제일 선호하는 일

1. 못난이 대행진

1. 똑게를 이기는 필살기

1. 갑은 공격하고, 을은 매복한다.

1. 전화 좀 돌리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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