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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ug 19. 2021

바통은 나까지만, 너는 경기를 끝내

(공무원 생태학-fiction)

내 컴퓨터엔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이 있다. 대대로 물려받아 대대로 물려주는 사업이다. 사업명은 너무도 고귀해서 의심을 품거나 감히 거부하기 어렵다. 그건 공무원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


‘인권정보화사업’


행정이란 자고로 손에 잡히고 피부에 와 닿아야 하는데, 사업명을 뭐 이렇게 고귀하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높디높은 단어 두개를 모아 놓았다. 아날로그 감성의 정점 ‘인권’과 새로운 세계인 사이버를 대표하는 ‘정보화’를 짝지어 놓은 것이다. 이 사업은 관념적이어서 손에 잡히는 사업에 언제나 밀렸을 것이다. 모든 자산은 결국 중요한 것보다 급한 것에 투입될 수밖에 없으니까. 인권정보화사업은 밀리고 밀려 나에게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나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작성한다고 한들 급한 사업에 밀릴 것이 뻔하다. 이번 예산심의에도 전년도 자료에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과장님도 어차피 알 될 것이니까 ‘인권’과 ‘정보화’의 중요성을 조금 보강하고, 다른 현안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하신다. 나는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나른한 점심시간이다. 밥먹고 의자에서 당당히 졸 수 있는 꿀같은 시간이다. 과장님이 들어오신다. 투덜거리며 오후에 의원실에 가봐야 한단다. 집단소송이 지연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단다. 그 집단소송은 벌써 수 년 째 사건으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쨌든 자료를 챙겨 국회로 출발한다. 잠깐 인터넷을 열어보니 시장, 군수, 시민단체들이 합동으로 기자회견을 했단다. 수 만명이 소음과 오염에 고통받는다며 우리국을 꼭 찍어 각성하라고 한다. 왜 갑자기 지자체장까지 가세한 것인지 모르겠다. 의원실에서 법령상 , 실무적으로 주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텐데, 왜 그런건지 모르겠다. 과장님은 '지자체 선거가 얼마 안 남았잖아'라고 혼자말 하듯 말씀하신다.


주민들의 지역구 의원실에 들어갔다. 보좌관이 의원님께 잘 설명부탁드린다며 의원실로 안내한다. 의원님이 심각하게 앉아있다.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드리니, 세부사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과장님은 수 만명의 관련된 것으로, 바로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의원님은 아직도 그걸 수작업으로 하고 있냐고 묻는다. 그러니 이렇게 민원이 심각해질때까지 해결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심해 한다. 도대체 시스템 개발하지 않고 그동안 뭘 한거냐며 나무란다. ‘인권 정보화 사업’이 아직까지 시도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 과장님은 '중기계획에는 반영되어 있습니다.'라는 하나마나한 답변만 했다. 하필 다음 날 우리부처 국회일정이 잡혀있다. 의원님은 장관님께 더욱 실랄하게 질타했고, 장관님은 지역주민과 소음과 오염에 대해 직접 소통하겠으며, 시스템 구축 또한 조속히 추진하겠다고 확언하셨다. 다음 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검토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계획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계획이 현실이 되려면 공무원의 품이 들어가야 한다. 막연한 계획일수록 품의 양이 가늠되질 않는다. 이 사업은 릴레이 바통같은 것인데, 내 차례에서 골인이라니, 전력질주라니. 어쨌거나 국회도 협조되었고, 장관님 지시도 있었으니 추진하는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야, 야근이야 항상 하는 것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또 끝나게 될 것이었다.


'인권정보화'니 우선 정보화실 담당자들에게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해야한다. 정보화실의 담당사무관과 주무관을 모시고 현장에 내려간다. 이 사람들이 사실상 전권을 가지고 있다. 사업추진의 시기와 배정받는 예산의 규모가 이 사람들로 한 번에 바뀔 수 있다. KTX 기차를 예약하고, 도시락도 준비하고, 현장 브리핑 프레젠테이션도 준비했다. 그렇게 지자체가 있는 소속청에 내려갔다. 정보화실 사람들도 토를 달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사업의 필요성을 금새 받아들이고, 몇 가지 보완할 점만을 제시했다. 그동안 긴급성, 비용대비효과 부족으로 번번히 좌절되었던 사업인데 물 흐르듯 단번에 사업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인권정보화사업은 출발되었으니 내용은 우리 부서가, 내가 채워야 한다. 이 시스템에 무엇을 넣을까. 과장님은 관련부서 간담회를 준비하라고 하신다. 아마도 상이 차려지면 모두 한 숟가락 얹어 놓는 품평회가 될 것이다. 자신의 부서에 일이 생기지 않는 범위내에서 고고하고 귀한 품평을 쏟아낼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소송, 징계, 갑질, 성희롱, 피해자보호, 상담시스템, 패소금지급, 민원, 국민신문고, 감사자료, 국회 통계시스템 뭐 끝도 없이 숟가락이 얹어진다. 인권 정보화는 아메바처럼 그 영역을 전 범위로 퍼쳐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전화해서 이번 기회에 꼭 반영해야 한다고 하신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다. 이거 다 넣으면 예산은 또 모자랄테고, 관리자 운영을 위한 인원도 증원해야 한다. 이렇게 추진하면 될 것도 안 된다. 예산, 인력, 소요시간 같은 것은 담당자인 나만의 몫이다. 하루하루 정신이 없다.


하루하루 지나다보니 지자체장 선거일이 지났다. 국회일정도 종료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이슈는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만큼 인권정보화사업은 지자체, 국회,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간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이슈와 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실국장님, 장차관님, 의원님에게 보고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신없는 하루다.


생각해보니 '인권정보화' 폴더를 열어본지 오래다. 역시 이번 릴레이에도 내가 결승선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나도 내 경험을 조금 더해 바통을 후임자에게 안전하게 넘겨줄 것이다. 후임자를 위한 작은 기원을 해본다.


'바통은 나까지만, 너는 경기를 끝내'




https://blog.naver.com/pyowa/22247558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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