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생태학
출근해서 로그인해보니 긴급공지가 떠 있다. 간부급 공무원의 청렴 결의식이 있단다. 직원들은 서약서를 회람시킬테니 서명하란다. 몇 달 전에 청렴선서를 했는데 '이건 뭐지?.' 직장생활하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다 이해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모르고 지나가도 별 문제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 알려면 나만 피곤하다. 그저 평소처럼 조간스크랩에 들어가본다.
어! 우리 부처에 대한 압수수색 기사 스크랩으로 가득하다. '이건 뭐야.' 기사를 하나씩 읽어본다. 뉴스 TV를 켜보니 벌써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우리 부처에 대한 품평을 시작했다. 언제나 볼 수 있는 전문분야 없는 전방위 전문가다. 역시 하나마나 한 얘기만 하고 있다. 방송사는 우리 부처 앞에 중계차를 펴고 진을 쳤다. 성을 박차고 나온 기사들처럼 기자들은 각자의 곳으로 흩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업무는 시작되었지만 다들 메신저 창이 바쁘다. 적당히 더해지고, 적당히 빼진 상태로 사건이 구성된다. 소문은 점차 그럴듯해지고 맞지 않는 퍼즐 맞추기 위해 더욱더 메신저로 소문을 낚아본다. 안테나 싸움이다. 굴리고 굴려진 소문은 비난과 동정을 담아 내 귀에까지 도착했다.
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했다고 한다. 어제 퇴근무렵 경찰이 들이닥쳐 업무수첩, 서류철, 컴퓨터 하드를 복제해갔단다. 구속영장도 청구한단다. 어제까지 밝게 웃으며 인사했던 직원이다. 그럴 인물이 못된다. 배포가 있는 친구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공무원이 범죄를 직무상 범죄를 저지르면 대부분 초범이다. 범죄를 저지를만한 사람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다. 그저 잘 되길, 아무 일 없길 바랄뿐이다.
사업방향이 몇 번 바뀌었다고 한다. 바뀌었다면 누군가 결심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보고서나 공문서에는 의사번복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말단직원, 중간관리자가 위험하다거나, 위법의 소지가 있다고 건의했다 한 들 그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에 공무원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처벌시스템을 갖고 있다. 기안자는 반드시 처벌된다. 기안자를 빼놓고 윗사람만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재라인에 있는 모두는 한 배를 탄다. 맨 앞자리에 기안자, 중간 관리자가 그 뒤에, 최종 결정권자가 마지막 의자에 앉게 된다.
결재를 거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조직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며 살아간다. 수학적으로 생각해보자. 대부분은 아무일 없을 확률이 높고, 일이 잘 되면 승진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극소의 위험이 현실화되면 그때서야 책임의 문제가 논의된다. 업무를 거부하기보다는 같은 배에 올라타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이 확률적으로 유리하다. 불이익도 너무나 크지만 확률은 아주 낮아 기대값도 낮다. 아무리 처벌 수위가 올라가도 부조리가 반복되는 이유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가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누군가 사무실 티비를 켰다. 실시간 속보에 법정이 보인다. 먹이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진을 친 기자들이 한무더기다. 승합차 한 대가 도착하자 플래시가 연사로 터진다. 머리를 숙인 채로 직원은 내렸다. 그리고 들지 않았다. 기자들은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도 모를 질문을 마구해댄다. 직원은 아무말 없이 기자들을 헤치며 법원 건물로 들어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실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청렴 결의식 대상자는 대강당으로 신속히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말단 직원인 나야 사무실에 있으면 된다. 서무가 청렴서약서 서명하라며 가져왔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서명란 위의 마지막 문장만 보였다.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 청렴서약서의 마지막 문구야 어느 기관이나 똑같다.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말이 있으면 더 세게 처벌할 수 있고, 없으면 문제삼지 않을 수 있는가. 서약서에 사인을 하면서도 참 바보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실 티비에는 법정에 들어가는 동료의 화면이 계속 반복되었다. 여느 날처럼 나는 다시 기안을 하고, 보고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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