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 안톤체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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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열린책들)은 안톤 체홉의 6개 희곡이 실려있다. 3편은 단막극이고, 3편은 4막극이다. - 청혼, -어쩔 수 없는 비극 배우, - 기념일, - 바냐 아저씨, - 갈매기, - 벚꽃동산. 안톤 체홉의 글은 다이나믹한 사건이 없다. 독백인 것만 같다. 희곡 6편도 그렇다. '벚꽃동산'을 읽고 독서노트를 4차례에 나누어 썼다. 독서모임을 마치니 무언가 알 것만 같기도 하다.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내 삶마저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뭘 원하는 게 아니다. 답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모두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제발 조용히 좀 하란다. 나의 얘기는 무시당하며 소음처럼 떠돈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그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죽기전까지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억으로 경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나의 과거를 되새김하며 살아간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찍히는 점에 불과하다. 과거의 향수와, 미래에 무언가 되어 있을 나만 생각한다. 과거의 빛나는 순간을 찾아낸다. 현재의 내가 별 볼일이 없어 보인다. 어쩌다 현재를 말할 때면 가족, 뉴스, 친구, 친구의 친구 얘기를 늘어 놓는다. 거기엔 여전히 내가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없이 살아간다.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바꾸려 한다. 품평이라는 말로 타인을 평가한다. 왠지 거기엔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결과가 눈에 띠고, 조건이 보인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자신의 조건만이 눈에 띤다. 결과가 잘못되면 조건의 탓이다. 자신은 할 것이 없다. 조건의 문제이니 잘못도 없다. 모든게 운이고, 운명이다. 운칠기삼이다.
나를 생각해보면 조건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게 너무나 많다. 대부분 아무런 이유가 없고, 설명할 수 없다. 운명이건, 운이건, 알 수 없음이건 다 같은 말이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는지, 내 삶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 없다. 삶은 조건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삶에서 할 수 있는 건 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고,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르지만, 지금을 느끼며, 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