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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0. 2024

내일은 조금 더 행복할 거야

함께 손을 마주 잡고 나아가기


언젠가 유튜브에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한 여자가 깨끗한 물이 담긴 컵에 검은색 물감 한 방울을 탄다. 금세 까맣게 물감이 번진 물은 누가 봐도 더 이상 깨끗한 물이 아니다.

이때 여자가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물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갑자기 그녀는 까만 물이 담긴 컵에 깨끗한 물을 콸콸 붓기 시작한다.

물을 부을수록 까만 물은 넘쳐 사라지고, 컵 안에는 다시 깨끗한 물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과연 인간도 똑같을까? 행복한 기억을 잔뜩 담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상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딜 가서나 붙임성 있는 성격에,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해야 할 말은 하는 성격을 가진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참 밝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다지 불행할 게 없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는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짐에도 가끔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쉽게 죽음을 갈망했다.


나에겐 청소년기에 겪었던 폭력적인 경험으로 마음 속 아직까지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시계 초침과 함께 여전히 두려운 상황에 갇혀 덜덜 떨며 울고 있는 아이가.


아물지 못한 상처는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다. 어쩌면 지나가는 바람이었을 상황도 나에겐 상처를 쓰라리게 하는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상처를 마주 보게 될 때면, 나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꽤나 버겁게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과거의 경험이 별거 아닌 상황에도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하고, 나의 행동을 조종하다니. 무력감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자라지 않은 아이를 그냥 없는 사람처럼 모른 채 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경험을 겪은 적이 없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연한 상황으로 아이를 마주하는 날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나는 그때는 몰랐던 것 같다. 우는 아이는 우선 안아줘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 보게 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나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주라는 말을 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내 안의 상처받아 울고 있는 아이가 있음에도, 모른 척하고 밀어내려고만 했구나. 내가 현재도 불행한 것은 다 너의 탓이라고 말하며 더 상처를 주기만 했구나.


그날부터 자기 전 조금씩 명상을 했다. 눈을 감고, 내 안의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괜찮다고 가만히 안아주었다.

'너의 탓이 아니야. 그런 일을 겪은 건 너의 탓이 아니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조차 너를 탓해서 얼마나 힘들었어?'

'이젠 내가 모른 척하지 않을게. 울고 싶을 땐 언제든 찾아와 안아줄게. 영원히 곁에 있어줄게.'


그렇게 몇 번 아이를 만나다 보니 사소한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를 안아주고 달래주는 과정에서 과거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나에게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 끝까지 나와 함께 있겠다고 하는 사람.


두 번째는 상황을 확대해석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줄었다. 나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확대해석해 쉽게 내 탓을 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내 옆자리 팀원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내가 뭔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곤 어제 나눴던 대화를 곱씹고 있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이런 순간부터 시작해, 어떤 때엔 타인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혼자 확대해석해서 상처받고 거리를 두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명상을 시작한 이래로 그런 경험이 확연히 줄었다. 늘 쉽게 생각하던 방향-내가 나를 괴롭히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현실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상처를 받은 경험은 어쩌면 극복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극복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시간에 갇히게 되고, 극복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게 되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삶을 살아나가면서도 분명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상처의 외면이나 무시가 아니다. 상처를 직면하고, 당시의 나에게 손을 내밀고 안아주는 것이 삶을 좀 더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임을 나는 조금 늦게 알아버렸다.


행복한 기억을 잔뜩 넣기 위해선,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내 삶에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면 그걸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는 사람. 나에게 검은색 물감이 묻었다고 그 물감을 빼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검은색 물감을 가지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다 보면 어느새 사소하게 쌓인 행복한 기억들이 나를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이 글을 보는 모두가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와의 싸움을 멈췄으면 좋겠다. 그저 아프다고 우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주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나겠다고 손을 마주 잡고 굳게 다짐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 각자의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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