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슈퍼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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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게에 일본 여자가 와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콜롬비아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콜롬비아 친구 L은 자신이 한 턱 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를 데려갔다. 아니, 괜찮은데 하고 들어온 슈퍼마켓 Isimo는 지나갈 때마다 한국의 CU가 생각나는 외관이어서 으레 "편의점"이겠거니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L은 나에게 "이거 먹어봤어?" "저거 먹어봤어?" "단 거 좋아해?" 하면서 내가 대답할 틈을 안 주고 혼자 신이 나 나에게 먹이고 싶은 간식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진열대에서 과자를 정리하던 한 남자 직원이 내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와우, 우리 가게에 일본 여자가 와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순간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을 해버렸는데 그는 머쓱했는지 스페인어를 알아듣냐고 물었다. 물론 내가 사는 동네, 허름한 슈퍼마켓이나 빵집에 들어가면 다들 한 번쯤 내 얼굴 보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개중 절반은 계산할 때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이 직원의 반응이 워낙 남달라서, 내가 이 가게에 들어온 게 그렇게도 놀랄만한 일인 가냐고 L에게 물었다. 그는 나에게 "사실 여기 콜롬비아에서 제일 싼 슈퍼마켓이라. 아마 너가 들어온 게 신기했을 거야"
내가 알기론 콜롬비아에서 제일 싼 슈퍼마켓은 D1(데우노)라는 체인이었다. 외관상 보면 다이소처럼 보이는데 들어가면 물건 종류는 많지 않지만, 일반 시중 슈퍼마켓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쌀, 우유, 빵 등을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공산품과 와인까지 저렴하다. 특히 와인이나 맥주, 음료수 종류가 저렴해서 길 가다가 보이면 물이나 맥주 사러 들어가곤 했다.
(*얼마나 저렴했냐면 쌀 500g에 7백 원, 레몬맛 맥주가 3백 원, 물 2백 원, 긴 식빵 1줄 1천 원 선이었다)
L은 D1와 지금 방문한 슈퍼마켓 Isimo 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알려주며, 내가 D1에 자주 간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냥 같은 물건이라도 30% 이상 저렴한 데다가 지나가다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자주 간다고 했을 뿐인데 그는 "외국인들은 보통 싼 슈퍼마켓에 들어가지 않아"라며 나에게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인가.
호스트는 같은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음에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일요일이었다. 함께 사는 호스트 패밀리 아저씨 R은 주말 장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고 나에게 구경 가겠냐고 물었다. 주말 장은 못 참지,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약 10분 거리를 달려 그곳에 도착했다. 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약 7~8명 상인들이 싱싱한 채소나 과일류, 홈메이드 페스토 및 잼류 등을 팔고 있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R은 바구니에 이것저것 담으며 상인과 근황 토크를 했고 그 와중에 나에게 "이거 한국에 있어? 없어?" 하며 없다고 하면 한 번 맛보게 해 줄게 하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채소와 과일 위주로 장을 본 뒤 그는 "주말에만 나오는 길거리 특식 먹으러 가자"라고 제안했다. 콜롬비아의 한 지역의 전통 음식이기도 한 '레초나(Lechona)'는 돼지 내부엔 잘게 찢은 돼지고기와 밥, 병아리콩, 야채 등으로 속을 채워 통으로 바삭하게 구운 요리이다. 1 그릇 주문하면 볼에 바삭한 돼지껍데기와 함께 속을 가득 덜어준다. 한국돈으로 약 3천 원이면 먹는 이 길거리 음식은 돼지를 통으로 구워야 하기 때문에 보통 주말에만 판매한다.
과자처럼 바삭하게 부서지는 돼지껍질을 한 입 베어 물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었다. 간은 기본 소금 간으로만 한 거 같았는데 밥에 돼지고기 향이 잘 베여 있어서 중간중간 씹는 식감을 더해주는 병아리콩도 맛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이거 집에 포장해서 맥주랑 같이 먹어도 맛있겠어요"라고 하니 아저씨 R은 아주머니에게 포장용으로 1인분 하나 더 주문했다.
포장한 레초나를 내 손에 들고 오토바이를 타려는 데 옆의 큰 마트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브랜드이고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리길래 R에게 "여기 슈퍼마켓이에요?"라고 물으니 R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데보다 여기가 많이 저렴한 걸로 유명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콜롬비아의 이마트 혹은 홈플러스에 비견되는 엑시토(el Exito)로 갔다. 그가 장 보려는 아이템 대부분은 아까 그 슈퍼마켓에도 다 있을 법해서 다시 R에게 "그냥 아까 그 슈퍼마켓에 가지 그랬어요? 같은 아이템이라도 훨씬 싸다면서"라고 물으니 R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그냥 난 거기에 가지 않아"라고 답했다.
참고로 R은 메데진에서 중산층 이상의 소득 수준을 자랑한다. 실례가 될 거 같아서, 더이상 묻진 않았지만 눈치껏 콜롬비아 어느 슈퍼마켓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소득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가설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콜롬비아에서도 사는 지역에 따라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는 만큼 '돈이 없어 보인다'는 이미지에 민감한 것으로 추측했다.
유럽 저렴이 마트 체인으로 유명한 알디가 생각났다
네덜란드 교환학생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국민 마트는 알버트 하인이지만, 간간이 알디(Aldi)라는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이 보이면 괜히 냉동식품이나 과자류를 사러 들어가곤 했다. 알디 역시 유럽 곳곳에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으로 유명한데 조금 속된 말로 '거지들이 가는 슈퍼마켓'이란 별명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학생이었고 "뭐 어때 학생이라 돈 없는데"하고 별 개의치 않고 들어갔었다. 물건 품목은 그리 많지 않지만, 냉동식품 종류가 상당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여러 가지 재료를 사서 요리하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제격이었다. 나름 냉동식품 퀄리티도 괜찮아서 친구들과 종종 방문하곤 했다.
이런 알디가 팬데믹 등으로 경제위기로 인해 이제 중산층인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슈퍼마켓 체인이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돈이 많고 적음을 과시하는 문화와 체면 문화가 적은 유럽에서 '가난한 사람들만 가는 슈퍼마켓 체인'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물론, 돈 앞엔 장사 없다는 걸까. 결국 인플레이션이란 현실 앞에서 이들은 '거지들의 슈퍼마켓'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위하며 알디를 찾기 시작했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중산층이 그리 많지 않은 콜롬비아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도 유럽은 중산층이 꽤 두텁기 때문에 기존 중산층의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거리낌" "퀄리티 있는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이해가 됐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중산층이 적은 콜롬비아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들 나름대로, A 슈퍼마켓은 외국인과 상류층만 가는 곳, B 슈퍼마켓은 중산층 이상이 가는 곳, C 슈퍼마켓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 보이지 않는 서열을 정해놓은 것이다. 그제야, 내가 C 슈퍼마켓에 들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더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