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 Nov 01. 2023

여행하다가 사랑에 빠졌을 때

콜롬비아의 일상과 연애



 콜롬비아 메데진 여행자들의 깜짝 맥주 번개 모임

C를 처음 만난 것은 메데진에 있는 여행자들의 깜짝 번개 모임에서였다. C는 벨기에 사람으로 10년째 디지털 노마드*로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날의 모임은 C가 "오늘 OO구역에서 맥주 마실 분"이란 제목으로 깜짝 번개 모임을 주최했다. 원고 마감을 위해 일요일을 카페에서 보내고 있었던 나는, 이후 원고를 송부한 이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딱 좋겠다 싶어서 모임 참석 의사를 밝혔다.


디지털 노마드 : 디지털과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를 합친 단어로, 노트북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보통 해외를 떠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한다.


원고 마감이 늦어져서 약속 시간보다 약 2시간 늦게 모임 장소인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콜롬비아에선 꽤 많은 슈퍼마켓에서 테이블을 차려놓고 술을 먹고 갈 수 있다)

축구 경기를 보며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콜롬비아 슈퍼마켓 앞 테이블

내가 도착했을 땐 독일인 B, 콜롬비아 사람 J, 구야나 사람 D, 벨기에 사람 C 4명이 있었고, 테이블 위 아래로, 이미 20개가 넘는 빈 맥주병이 있었다. 간단한 스낵 안주도 없이, 최소 1인당 5병 이상은 마셨다는 건데 그 누구도 취한 기색 없이 수다에 전념하고 있었다.

슈퍼마켓 테이블

 나 빼고 전부 남자들이었는데, 콜롬비아 사람 J를 제외하곤 다들 여행 경험이 상당한 사람들이었고 다들 디지털 노마드였다. 특히 벨기에 사람 C는 이란과 이라크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동유럽, 발칸 지역만 수년간 여행해 왔다. 다들 풍부한 여행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맥주를 마시면서도 정말 온갖 지리학부터 각종 문화, 정보 등이 쏟아져 나왔다. 각자의 여행 경험과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운 안주거리이다 보니 맥주병은 테이블에 계속 쌓여갔다.


"나 사실 너 처음 봤을 때 그냥 여행지에서 인스타그램 올릴 인증 사진 찍고 그런 여자인 줄 알았어"


 이 날 나는, 평소 입던 남색과 블랙 나시 대신 빨간색 홀터넥 나시에 긴 청바지를 입고 갔다. 여기에 조금 불편한 샌들을 신었는데 멋 부린다고 꾸민 게 아니라, 간밤에 비가 잔뜩 내려 운동화를 포함해 옷들이 잔뜩 젖어 빨래를 맡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C가 처음 본 나의 첫인상은 장기간 여행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효율적인(?) 옷을 입고 다니는, 관광객이었다고 한다. 나 역시 C의 첫인상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물론 이날 모인 사람들 중 그가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여행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이야기 소잿거리가 풍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스피커가 빌 틈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말을 쉴 새 없이 했다.


그가 "파키스탄 여행 모험담"을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 난 내심 반가워서 파키스탄에서 3개월 여행했었다고 넌지시 언급했다. 그러자 C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도 눈이 동그래지더니 "정말? 언제?" 하면서 내 파키스탄 여행에 갑자기 급 관심을 가지게 됐다. 얼떨결에 스포트라이트를 C에게서 빼앗은 셈인데 인도 여행하다가 파키스탄 국경을 즉흥으로 건너게 된 사연부터, 북부 한 마을에 도달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3개월이 지나가버렸던 이야기 등을 공유했다.


이때 C는 처음으로 내가 "모험 쫌 하는 빡세게 여행하는 여행자(Hard traveler)"란 것을 깨달으며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하다 보니 C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고 여행 취향도 비슷했다. 콜롬비아에 오기 전 멕시코부터 시작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까지 똑같은 루트로 건너왔다. 둘 다 육로로 국경 넘는 것에 집착.. 하는 편이었고 로컬 버스 이용을 사랑했다. 물론 차이점은 나는 파나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콜롬비아로 왔다는 것이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국경 중 하나인 다리엔 갭*을 건넜다는 것이다.


다리엔 갭: 파나마 야비사(Yaviza)와 콜롬비아 투르보(Turbo)사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거대한 지협으로 늪과 열대우림 지대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국경 중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난민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건너는 육로 국경이기도 하다. 보통 여행자들은 사실상 다리엔 갭을 육로로 건너는 걸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리엔 갭을 배 타고 건넜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는 실제 언제 침몰해도 이상하지 않을 작은 통통배를 타고 다리엔 갭을 건넜다. 당시 사진들을 보여주며, 다리엔 갭을 건너면서 있었던 우여곡절을 공유하는데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얘는 정말 찐 여행자이구나, 내가 하고 싶었던 모험을 제대로 했네란 부러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들었다. C가 궁금해졌다.



서로 다음 목적지가 달랐다

이 날 모임을 밤 10시쯤 파하고, C는 나에게 술 한 잔 사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크리에이티브한 수제맥주로 유명한 벨기에 사람이었고, 나는 수제맥주 덕후였다. 한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 도시를 가건 그 도시에서 만든 수제맥주를 꼭 마셔보는 편인데 둘 다 수제맥주에 진심이라는 관심사가 통했다. 마침, 콜롬비아에선 수제맥주로 유명한 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 함께 가는 길에 폭우를 만나 사람 별로 없지만, 라틴 음악이 흐르는 한 바에 들어갔다. 병맥주를 시키고, 시끄러운 배경 음악을 뚫고 C와 나는 아까 모임에서 하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C는 메데진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콜롬비아 수도인 보고타에 갔다가 칼리 거쳐 에콰도르 갈 예정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C는 콜롬비아 부카라망가(Bucaramanga)란 곳에서 한 달 살기 할 예정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그에게 뭐가 특별한 것이 있냐고 되물었는데 "특별한 게 없는 도시라서 가는 것, 이미 한 달 살 아파트는 구했어"라고 답했다.


콜롬비아 부카라망가는 콜롬비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인데 관광이라 할 건 별로 없는 노잼 도시 같은 곳이다. 도심 내 공원이 많아 '공원의 도시'란 별명이 붙은 곳이기도 하다. 그가 부카라망가에 가는 이유는 메데진보다 더 현지스러운 곳에서 1개월 머무르면서 일에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C는 영국 회사 데이터 분석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 이직한 이후 1개월간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살기 좋은 도시를 찾다가 부카라망가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부카라망가는 메데진보다 물가가 훨씬 저렴하고, 치안도 꽤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콜롬비아에 오래 산 외국인들 사이에선 부카라망가가 다음 목적지로서 요새 급부상하는 곳이다.


그는 나에게 슬며시 "부카라망가에 같이 가자. 이후 아마 난 베네수엘라에 갈 거 같아"라고 제안했다. 베네수엘라 여행을 한다고? 베네수엘라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문제뿐 아니라 치안이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유명하다. 베네수엘라를 탈출하는 난민들이 콜롬비아로 건너오는 와중에 베네수엘라 여행을 한다니.

"미쳤어 베네수엘라 여행을 생각한다니"


나도 모르게 C 앞에서 크게 읊조렸다. C는 "그래도 은근 구미당기지 않아? 파나마 다리엔 갭 건너는 것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베네수엘라에 못 갈 이유가 없지"


나는 여행할 때 살짝의 스릴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가지 말라는 위험한 곳을 찾아서 가진 않는다. 중남미에서 그나마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에서도 '혼자 여행하는 아시아 여자'란 이유로 매번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내해야 했고, 그들의 가장 만만한 타깃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만약 누군가와 함께라면 한 번 가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있곤 했다. 혼자라면 베네수엘라 여행을 고려조차 안 했겠지만 C 같은 베테랑 여행자라면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줄 거 같기도 했다. 마지막 병맥주를 마시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2주 후 나는 에콰도르로 향하고 있을까, 콜롬비아 부카라망가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을까.


이전 05화 마트 직원이 날 보고 놀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