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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Nov 08. 2023

한 달 살기 중 밥솥을 선물로 받았다

콜롬비아 부카라망가 

본 글을 읽기 전에 아래 글을 읽고 오시면 더욱 도움 됩니다. 

여행하다가 사랑에 빠졌을 때 


외국인이 거의 없는 부카라망가에서 한달살이 시작하다 

C와 나는 콜롬비아 부카라망가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지도상으론 메데진에서 거리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산길을 구불구불하게 달리기 때문에 예상 소요시간은 약 10시간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은 오후 4시 정도였는데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넘어 있었다. 


C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콘도미니엄 형태였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외국인들을 위한 레지던스 시설에 가까웠다. 방 2개에 화장실 2개, 거실, 부엌, 발코니까지. 약 25평 남짓 되는 아파트이다. 공용 시설로 수영장과 사우나, 피트니스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24시간 경비 보안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한 달 사는데 한화로 약 90만 원 정도로, 우린 각각 절반을 부담했다. 




냄비밥 못하는 한국 여자 

나는 요리에 젬병이고, C는 요리를 좋아한다. 내가 밖에 나가서 길거리 음식, 서민 식당 가는 것을 선호할 때 C는 슈퍼마켓 가서 장을 보고 직접 요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벨기에 사람이지만 어머니가 이탈리아 계열이라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종종 한국식 피자와 파스타 사진을 보여주면 "자 이제 피자와 파스타 사진을 보여줘, 여기에 피자와 파스타가 어딨어"라고 짓궂게 대답하곤 한다. 


또한 감자튀김 자부심이 엄청 나서 종종 놀려주려면 감자튀김을 '프렌치프라이(French Fries)'라고 부르면 된다. 그럼 살짝 째려보며 '벨기에 프라이'라고 정정해 준다. 전 세계 유통되는 냉동 감자튀김 중 대다수가 벨기에에서 수출하는 거라는 걸 덧붙여주며. 


파스타, 와인을 넣은 닭고기 요리, 야채수프 등 지극히 유럽에서 먹는 가정식 위주로 요리를 하는데, C는 의외로 빵을 자주 먹지 않고 오히려 밥을 선호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C와 함께 '밥 하는 법'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쌀 문화권이 아닌 서양인들은 종종 밥 할 때 씻지도 않고 끓는 물에 쌀을 그대로 넣어 밥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서양 요리 유튜버들이 그런 식으로 밥을 하니, 이들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에겐 마치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 파스타를 반으로 부수는 것과 마찬가지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밥을 좋아한다는 그에게 "너도 혹시 밥 할 때 씻지도 않고 물에 쌀을 부어버리니"라고 물으니 그는 "아냐 나 쌀 씻고 냄비밥 잘해"라고 발끈했다. 


메데진에 있을 때 그가 생선 수프를 요리하는 동안 나에게 밥을 맡겼는데 하필 현미쌀이었다. 고백하자면, 난 한국에 살 때도 일주일에 두어 번 쌀밥을 먹을까 말까 할 정도로 서구식 식단에 체화된 몸이다. 혼자 살았기 때문에 굳이 밥을 지어먹기보다 햇반을 돌려 먹는 게 익숙한 나에게 현미쌀로, 그것도 냄비밥 해달라는 그의 요청은 꽤 부담이 됐다. 


내가 이미 "서양애들이 밥 하는 방식"에 열변을 토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아 나 사실 밥 못해"라고 말을 주워 담기에도 애매했다. 결국 난 구글에 빠르게 현미쌀 밥하는 방법을 검색하고 대강 중불, 약불 몇 분 정도 올려야 하는지 체크했다. 쌀 불릴 시간도 없어서 쌀 씻고난 후 그대로 안쳤는데, 물 양 조절을 못했는지 꼬들밥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먹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에게 "음... 밥이 왜 이렇게 딱딱해"라고 묻는 그의 질문에 "원래 현미밥은 이렇게 먹어"하고 바득바득 우겼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같은 쌀에 월계수 잎까지 넣어 지은 완벽한 냄비밥을 나에게 선보였고,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냄비밥 못하는 한국인이라니, 자존심이 괜히 상했다. 


"한국에선 대부분 밥솥으로 밥 해 먹어, 얼마나 기술진보적인 사회야. 밥솥이 있으면 내가 매일 밥 하지"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밥솥을 사 왔다 

부카라망가에서의 둘째 날, 나는 하루종일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 일찍이 일을 끝낸 그는, 슈퍼마켓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제 밤늦게 카트 한가득 채워 장을 보고 냉장고를 가득 채웠는데 대체 살 게 뭐가 더 있지?라고 반문하니 향신료 양념 재료랑 어제 못 산 와인을 금방 사 오겠다고 했다. 


대형마트까지 거리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로 상당히 가까웠음에도 C는 나간 후 약 2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 바쁘게 원고 마감하다가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해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답이 없었다. 약 30분쯤 후에 그는 "내가 손이 모자라서 그런데, 그 아파트 밑에 있는 약국 가서 이것 좀 사다 줄 수 있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요청한 것은 거즈랑 알코올 솜이었는데 어디 다쳤나 싶어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약국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C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어디 다친 데 없이 말짱해 보여 잠시 의아했다. 뭐 때문에 거즈랑 알코올 솜 사달라고 한 거야?라고 물으니 C는 "비상용으로 구비해 두면 좋지"라는 얼토당토 되지 않는 핑계를 댔다. 시치미를 뚝 땐 체 저녁에 먹을 닭 요리를 준비하던 C는 "지금 밥 해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이미 냄비밥 하기에 실패했던 전적이 있었던 터라, 그의 요청이 오히려 짓궂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매번 점심, 저녁 메뉴를 책임지는 C에게 내가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것은 밥이나 샐러드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이번엔 현미쌀 말고 흰 쌀로 해야겠어"

"자신 있어?"

"뭐 자신 없어도 해야지, 왜?"


그는 내가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손을 뒤로 한 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며 씩 웃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오려면 2개월은 훨씬 남았는데?라고 말이 끝내기도 전에 그는 짠한 소리와 함께 내 앞에 한 박스를 내밀었다. 그 박스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밥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무거운 전기밥솥이 아닌, 해외 유학생들이라면 한 번쯤 써봤을 1~2인용 밥 하기 좋은 밥솥이었다. 취사와 보온 기능밖에 없지만, 그래도 나름 최소한의 밥솥 기능을 수행하는 녀석이다. 

결국 이날부터 나는 밥을 책임지기 시작했다. C는 아침에 일어나 커피부터 내리고, 나는 차를 우려먹으며 쌀을 씻었다. 언젠가부터 어떠한 고기 요리나 수프 요리를 하건, 밥을 항상 곁들여 먹기 시작했다. 언젠가 전날 남은 찬밥 위에 그가 만든 뜨거운 야채수프를 끼얹어 국밥처럼 먹으며 "한국 국밥 스타일"이라고 알려준 이후부터 그는 언젠가부터 모든 수프에 밥을 말아먹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국밥처럼 먹는 야채수프 

한국에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밥을 해 먹지 않았는데, 콜롬비아에서 매일 밥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고작 한 달 살 건데 C가 사준 밥솥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렇게 콜롬비아에서 매일 밥 하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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