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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Nov 06. 2023

여행 유튜버 포기 선언

고프로를 샀지만, 여행 유튜버는 못하겠습니다.

"유튜버해, 왜 유튜버 안 해?"


10년 전 시베리아 횡단 기차 타고 유라시아 일주 9개월 여행, 인도와 파키스탄 8개월 여행 등 대학교 휴학을 최대한 활용해 가난한 배낭여행을 했다. 당시에도 유튜브란 존재가 있었지만 "누가 유튜브 같은 걸 봐"할 정도로 의미 없는 UCC 영상들만 가득했다. 물론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요새 유튜브 안보는 사람 누가 있어?"라는 말로 바꿔야 할 정도로 유튜브는 많은 사람들을 도파민 중독으로 이끄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언젠가 유명 유튜버 영상들의 여행 영상 (인도 기차 꼬리칸 타기, 시베리아 기차 횡단에서 북한 사람 만난 이야기) 등이 화제를 타고 올라오면 종종 술자리에서 내 여행 썰을 들었던 지인들이 "야, 너가 그때 유튜버했었어야 했어"하고 괜히 나 대신 안타까워했다.


내가 후회하는 건 내가 그때 유튜브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시 여행 기록을 아직까지 정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꽤 부지런해서 일기를 꼬박꼬박 쓰곤 했는데 여행 마치고 티스토리 블로그에 조금씩 올리다가 잠시 휴식기를 가졌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내 블로그가 해킹당했고 그 이유로 블로그는 삭제되어 나의 글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올해 3월, "퇴사하고 1년 중남미 배낭여행하러 갑니다. 1개월씩 각 국가에서 살아보려고요" 하고 지인들에게 알리니 다들 "유튜브 하라"라는 말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남이 하는 여행 영상에 굳이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흔한 여행 유튜브 영상을 본 적도 없었다. 종종 지인들이 "이거 보니 너 생각나더라"하면서 톡으로 특정 여행 유튜버 영상을 보내주곤 했다. 하도 많이 들으니, 나도 모르게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고프로 최신 기종을 직구로 질렀다.

내가 구매한 고프로

굳이 유튜브 할 용도는 아니고, 중남미에서 액티비티를 많이 할 거니까 그거 기록용이란 핑계를 대며. 어차피 고프로를 샀으니 유튜브를 시작해 볼까? 옛날 유튜브 영상이 UCC라고 불리던 시절에 베가스 같은 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취미로 올리곤 했다. 그때도 편집했으니 영상 편집은 금방 배울 거야. 그리고 냅다 어도비 프리미어 무료 체험도 해보고, 유튜브 영상에 올라온 편집 관련 영상도 찾아봤다. 편집은 생각보다 할만한데? 문제는 영상 촬영이지.


그렇게 여행 유튜버는 1도 생각 안 한다고 하던 나는, 언젠가부터 여행 유튜버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K 영상에 담긴 내 얼굴에 식겁했다

전자제품을 살 때 설명서나 튜토리얼 따위 읽어 보지 않고 일단 이것저것 눌러보면서 익히는 사람이다. 여행 유튜브는 어떻게 하지? 란 생각은 하다가도 멕시코로 출국하는 날까지 방법론에 대해서 그리 많이 찾아보진 않았다. 그냥 고프로 카메라 한 손으로 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멕시코로 입국하는 순간부터 찍어야 지란 안일한 생각만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나마 미리 한 것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대로 고프로 카메라 설정 정도? 누군가가 요새 여행 유튜브는 4K 영상으로 찍어야 해란 말을 들었다. 풍경 담을 것도 아닌데 4K 영상을? 이란 말에 다소 갸우뚱했지만 일단 4K 영상에 화각 설정까지 완료했다.


 카메라를 보면 표정이 어색해지는 편이다. 누군가가 사진 찍어줄 때도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몰라 어색한 표정으로 찍혀 내 사진을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그런 내가 유튜브라니? 첫날 멕시코 공항에 자정 넘은 시간에 떨어져 숙소에 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고프로를 꺼내 첫날 소감을 주절주절 남기는데 영상을 다시 봐도 어색하다.


심지어 짧게 짧게 찍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던 나는 나름 롱테이크(?)로 카메라 켜고 3분 이상 이야기 하는 영상을 찍었고 별거 아닌 이 영상이 10GB 넘는다는 사실에 식겁했다. 물론 이 용량은 그다음 날 둘째 날 다 찍고 영상을 정리하는 과정에 깨달았고 모든 영상들이 지나친 화각으로 왜곡되어 보일 뿐 아니라 어색했다. 게다가 내 맥북 프로에 영상을 넣고 편집하는데 4K 영상으로 영상 편집했다간 날을 새야 할 판이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그냥 아이폰으로 찍고 말지. 아무리 생각해도 고프로 4K 영상으로 내 얼굴을 담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재밌는 순간은 카메라가 꺼졌을 때 일어난다

유튜브는 결국 편집의 예술이다. 하루 10시간을 돌아다녀도 그중 5~7분 재미있었던 부분만 편집해서 올린다. 즉, 9시간의 지루함이 있다면 그중 1시간의 재미에서 일부를 편집해서 올리는 셈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하니, 유튜브 각이라고 할 만한 재미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행할 때 그냥 산책하듯이 지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편인데 카메라를 들기 시작하자마자 "뭐라도 유튜브각을 뽑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놓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으며 볼 수 있는 풍경 등을 무시하고, 뭐라도 사람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소잿거리가 없나만을 찾게 된 것이다.


내가 멘붕이었던 순간에 나를 도와줬던 멕시코 대학생 3명, 내 인생 첫 찐 멕시코 타코를 먹을 때 나에게 이것저것 농담하며 포켓몬 이야기하던 아재들, 치킨 타코 뜯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초점 나간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니 나 대신 이 아저씨에게 화내며 싸워준 한 멕시코 커플 등 정작 하루 중 가장 기억에 남고, 그나마 유튜브 각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은 모두 내가 카메라를 껐을 때 일어났다.



파파야를 주지 마라

콜롬비아에선 "파파야를 주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흔히 콜롬비아 치안에 대해 이야기하면 으레 하는 말인데 유혹 거리가 될만한 "파파야"를 애초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해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즉, 괜히 고가의 물품이나 휴대폰 등을 보여주어 굳이 타깃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뉘앙스라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어찌 됐건 최대한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아시아인, 여자, 혼자 란 키워드는 존재 자체로 가장 만만한 타깃이 된다는 것이다. 굳이 폰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희귀해서 어딜 가나 눈에 띄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특히 꽤 많은 현지인들은 유럽이나 미국보다 훨씬 먼 일본,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더 부유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즉, 그냥 존재자체가 "파파야"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프로나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콜롬비아의 한 동네는 치안이 좋은 곳으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내 벨기에 남자친구는 러시아인 친구와 맥주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도 보려고 스마트폰 꺼내는 그 순간 오토바이 무리로부터 공격당해 순식간에 스마트폰 날치기를 당하고 몸 여기저기 상처에 타박상을 얻었다. 덩치가 큰 서양인 남자 둘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다가 날치기를 당하는 마당에, 내가 고프로를 들고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내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그동안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을 거치면서 여행해 왔고 위험에 처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나라들이지만, 어딜 가나 나쁜 사람들은 존재한다. 특히, 존재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경우엔 더더욱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존재의 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멕시코에서 한 일주일 소심하게 스마트폰과 고프로로 촬영하다가 여행 유튜버 되기를 포기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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