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차희 霸王茶姬
대만 여행을 할 때 최소 1일 1 밀크티를 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랑말랑한 타피오카가 들어가 있는 버블티(珍珠奶茶)일 텐데, 대용량 사이즈의 컵에 아낌없이 들어가 있는 버블과 달콤한 밀크티 음료는 한국에 있다면 살찐다는 이유로 절대 마시지 않을 음료인데 여행할 때만큼은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마음껏 즐긴다.
버블티의 기원은 1980년대 대만 타이중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춘수당(春水堂)과 한린다관(翰林茶館)이 원조로 꼽히는데, 이후 중화권과 화교 중심으로 버블티 문화가 아시아에 확산된다.
대만만큼이나, 중국 대륙에서도 수많은 밀크티 브랜드가 각축전을 벌인다. 저렴한 가격으로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달래주는 미쉐빙청(蜜雪冰城)부터, 프리미엄 밀크티를 지향하는 희차(喜茶)까지. 중국 여행을 할 때 만날 수 있는 유명 밀크티 프랜차이즈들의 시그니처 음료들을 하루에 하나씩 맛보기만 해도, 몇 주 이상 소요될 정도로 다양하다.
중국뽕과 온고지신 그 사이
패왕차희(霸王茶姬)는 최근 중국 방문했을 때 길거리에서 5명 중 2명 이상은 이 밀크티 컵을 들고 있어서 눈에 들어온 프랜차이즈였다. 이름마저 독특하다. 무려"패왕차희"라니. 영화 <패왕별희霸王别姬>에서 '별别' 대신 '차茶'를 쓴 네이밍이 센스가 있다. 게다가 컵 디자인이 황실의 기풍이 느껴지는 화려함이 인상적인데, 심지어 패왕차희 배달용 봉투마저 이 디자인은 그대로 이어진다. 디자인에 진심인만큼 이들의 굿즈도 눈여겨볼만한데, 부채, 전통 복식이 가득한 옷장 콘셉트로 한 티백 박스 등이 있어 중국 여행 기념품 구매욕을 일으킨다.
확실히 중국 Z세대들에게 인기 많은 중국풍 트렌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선 Z세대들 사이에서 소위 국뽕에 가까운 궈차오(国朝) 트렌드가 지난 수년간을 휩쓸었는데, 종종 과격한 디자인과 지나친 뽕(?)으로 인해 외국인들은 공감 못하는 브랜드 역시 꽤 많았다. 반면, 패왕차희는 화려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으로, 비단 중국 사람들뿐 아니라 외국인의 시선을 확실히 끈다. 패왕차희는 스타벅스가 커피계의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된 것처럼, 밀크티계의 스타벅스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꿈꾸며 외국 진출을 활발히 꾀하고 있다.
낭만이 느껴지는 네이밍
패왕차희는 차에 우유를 탄 순수 밀크티를 지향한다. 물론 여기에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고객들을 위해 휘핑크림을 무지막지하게 올리긴 하지만, 휘핑 빼고 음료 자체만 본다면, 그동안 중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코코 버블티나 희차의 크림치즈밀크티에 비교하면 오히려 밍밍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평소 영국식 밀크티 (따뜻한 차에 우유를 아주 살짝 넣어 먹는 형태)를 즐긴다면 , 패왕차희 밀크티가 취향에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달콤한 버블티, 밀크티가 익숙한 사람들에겐 패왕차희 밀크티가 오히려 싱겁게 느껴질 거 같다. 기본당도가 다른 밀크티 브랜드보다 낮은 탓인데, 차 원물의 맛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는 '건강'에 관심 많은 젊은 세대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부합해 큰 인기를 끌었다. (당도는 낮지만, 엄청나게 높은 카페인 함량으로 인터넷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시그니처 음료는 은은한 재스민 밀크티인 백아절현(伯牙絶絃). 다른 음료명들도 백무홍진(白雾红尘), 청말관음(清末观音) 등 사자성어에서 이름을 땄다. 직관적인 네이밍이 아니라, 음료 주문할 때 대체 이게 무슨 음료냐고 되물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설명을 듣고 다시 이름을 곱씹어보면 "아, 그래서 백무홍진이라 부르는구나" 깨닫게 된다. 시(詩)적인 네이밍에서 조차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느껴진달까. 낭만이 느껴진다.
스타벅스를 대놓고 저격한 패기
패왕차희 로고를 보면 빨간 원 안에 전통 복식을 입은 한 여인이 눈을 감고 있다. 자연스레 스타벅스의 사이렌 로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패왕차희 매장과 스타벅스 매장이 함께 있는 곳엔 이 두 로고가 서로 마주하고 있어 "서양 여인 VS 동방 여인의 대결"이라며 SNS에서 흔한 짤처럼 돌아다니곤 한다.
패왕차희가 공언을 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스타벅스의 많은 면모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테이크아웃 판매가 위주인 밀크티 업계에서 널찍한 매장을 통해 '제3의 공간' 전략을 취하는 것, 중저가 가성비 전략, 독자적인 디자인을 통해 충성 고객을 만들어낸다는 점 등이 돋보인다.
스타벅스의 인기가 점점 사그라드는 요즘, 패기 있게 그 자리를 치고 올라오는 이 독특한 밀크티 브랜드의 귀추가 기대된다. 중국에 방문한다면, 한 번쯤 패왕차희 밀크티를 마셔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참고>
카피캣을 넘어 벤치마킹의 귀재로, 이 밀크티 브랜드의 시장 공략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