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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높은 도시의 이방인에 대한 환대

셀 & 세르히오 (Sel & Sergio), 과달라하라, 멕시코

by 노마


“왜 과달라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려는거야?”

멕시코시티에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중 한 친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순진한 이방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과달라하라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본거지라는 걸 알고 있어?”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과달라하라 카르텔은 1980년대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손을 잡고 악명을 떨쳤던 전설적인 조직이다. 오늘날 멕시코를 좌지우지하는 여러 대형 카르텔의 뿌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악명높은 멕시코 마약왕 엘 차포 역시 초기에는 이 카르텔에 몸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바꾸기에는 부족했다. 그 논리라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도 마피아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14년 전에 나홀로 방문했던 시칠리아는 로마와 나폴리보다 훨씬 안전하고 평화로웠다. 영화 <대부>의 촬영지를 둘러보기도 하고, 낡은 비치백에 수건 하나 넣고 혼자 해변에 누워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든 현재든 이런 조직들의 본거지는 일반 시민들에겐 안전한 경우가 있다. 그들의 ‘비즈니스’에 연루되는 일만 없다면, 오히려 다른 곳보다 치안이 좋은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의 조직원이 시민을 상대로 한 사소한 범죄에 연루되면 오히려 조직에서 먼저 조직원을 처벌한다는,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다고 들었다.

IMG_8545 2.jpg 과달라하라

아이러니하게도 과달라하라는 멕시코에서 치안이 좋기로 소문난 도시다. 멕시코 한 달 살기를 계획하는 꽤 많은 한국인들도 같은 이유로 이곳을 추천한다. 멕시코시티보다 안전하면서, 큰 도시라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춰져 있으면서도 도시가 깔끔하다. 한 달 내내 머물 만큼 볼거리가 넘쳐나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이 마음 편히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하지만 멕시코 다른 도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마약 카르텔 때문만은 아니다. 과달라하라를 ‘게이달라하라(Gaydalajara)’라고 부를 정도로, LGBTQ+ 문화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도시가 속한 할리스코 주는 동성 결혼이 합법이고, 멕시코 최초로 트렌스젠더 아동과 청소년들의 법적 성별 변경 권리를 인정한 주이다. 내가 과달라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하니, 혹시 나보고 레즈비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IMG_8547 2.jpg 과달라하라

내 흥미를 끈 건 단순 LGBTQ+ 친화형 도시라서가 아니었다. 이 곳이 동시에 멕시코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톨릭 도시라는 점이었다. 종교 보수성과 가장 활발한 성소수자 문화가 공존해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니.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1800년대 영국 궁정에 흑인 여왕과 귀족들이 등장했을 때의 그 기묘한 조화가 떠올랐다. 이질적이지만 묘하게 어우러지는. 거기에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뿌리까지. 멕시코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나쁜 사람일수록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며 용서받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과달라하라가 가장 종교적인 도시가 되었다고도 말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가 한데 뒤엉킨 모양은, 이 도시를 더욱 섹시하게 만들었다.




아마 이 곳에 온 관광객은 내가 처음일거야


과달라하라에서 나고 자란 셀(Sel)과 세르히오(Sergio)는 같은 동네 출신 커플이다. 소꿉친구라기 보다는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우연히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지는 않았지만, 동네 빵집과 식당, 루차 리브레(Lucha Libre 멕시코 식 프로레슬링)경기장까지 같은 장소들에 대한 각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들이 로컬 루차 리브레를 보여주겠다며 자신들이 나고 자란 그 동네로 나를 데려갔다. 세르히오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던 수제 햄버거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주인 할머니가 철판에 번을 올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세르히오가 요만했을 땐 말이야” 그녀는 세르히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열 살 때였나, 매일 학교 끝나면 여기 와서 햄버거 하나 달라고 했는데, 막상 돈이 모자라서 늘 감자튀김만 시켜먹곤 했지.” 그리고 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완전 달랐어. 엄마 손 꼭 잡고 와서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먹기만 했지.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말이야.” 할머니가 철판을 닦으며 웃었다. “그런데 이 둘이 처음 함께 왔을 때는 정말 못 알아봤어. 항상 말 없고 조용했던 아이가 장난꾸러기 세르히오와 사귈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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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구운 번 위에 양상추를 깔고 다진 고기 패티를 올린다. 이윽고 소스에 버무린 야채와 둥근 양파링, 그 위에 케첩과 마요네즈, 머스타드 소스까지. 곁들여진 감자튀김에도 대충 뿌려져 있었다. 찍먹파라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소스가 베어 살짝 눅눅한 감자튀김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느 멕시코 음식처럼 소스가 재료 맛을 가릴 정도로 많이 들어간 것은 아쉬웠지만, 이게 바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추억의 햄버거 맛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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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노마드로서 일을 하며 세계여행을 합니다. 한국 환승하면서 암 3기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 후 다시 배낭을 메기 시작했습니다. 뻔하지 않은 여행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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