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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호 Feb 17. 2020

청춘 드라이브

  "엑셀레이터를 막 밟은, 가속도 붙는 그 순간이 청춘이다."


  청춘 (다음 사전)

       1) 한창 젊고 건강한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봄철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2)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서 만물이 푸르게 된 봄철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꺼내 햇살이 잘 드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은 가을 햇볕이 유난히 따뜻하다. 평일 낮 독서실 좁은 휴게실에는 나뿐이었으나 보온 도시락은 엄마의 정성이 담겨 있어서 인지 아직 따뜻했다. 중학교 때 매일 같이 가방에 단골손님으로 들고 다녔었는데 스무 살에 다시 드는 게 반갑기도 했다. 반찬은 생채 무침과 부추 전이었다. 엄마가 부추 전을 한 입 크기로 썰어 가지런히 담아 주셨다. 밥을 한 숟가락 뜨는 데 밥알 위로 햇살이 비춰 눈이 부셨다. 재수가 죄수인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술을 마시느라 축구 동아리에서 볼을 차느라 바빴었다. 또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고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기숙사 생활로 삼 년을 함께 살았던 친구들이었기에 가끔 모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공부한다는 핑계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연락이 뜸해지기도 했다. 아이보리 색 국사 교과서를 읽다가 잠깐 쉬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게 해가 지며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석양이 섞인 하늘색은 붉게 물든 낙엽들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내가 다녔던 독서실은 언덕 위 성당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고 저 멀리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머리 부분이 보였다. 그때 꿈을 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소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는 간절했다. 바로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당당하게 걸어 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사 개월 뒤 나는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 꿈을 이루고 또 십육 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 꿈을 향해 드라이브 중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팩을 끼어서 플레이하는 게임을 좋아했다. 엔딩을 보기 위해 사촌 동생과 여러 날을 밤새기도 했다. 마치 영화가 한 편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 후 쿠키 영상이 나오는 것처럼 게임도 비슷했다. 어려운 관문을 반복적으로 도전하면서 해 내는 성취감이 있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 오락실과 PC 게임에 친해졌고 고등학교 때 인터넷 야후를 처음 접했을 때 신세계를 느꼈다. 당시 난 문과였지만 전공을 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인터넷이었다. 세이클럽, 다모임처럼 채팅과 쪽지가 금세 유행이 되었고 다음 이메일은 팬레터를 주고받는 것처럼 나름 로맨틱했다. 다행스럽게 정보통신 전공인데도 문과 학생의 지원을 받아주는 학교가 있었다. 난 마음속으로 그 학교에서 그 전공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수능이라는 종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도 그 길에서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 모두 한 방향, 한 뜻으로 걸어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문과생이었던 나의 선택이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에 뜻 밖이라는 반응이었다.

 본래 나의 전공은 세 개 전공을 합쳐 놓은 실험적인 학문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방면으로 공부하고 싶었던 나와는 잘 맞았다. 컴퓨터 지식을 갖춘 엔지니어들과 말이 통하고 그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컴퓨터공학 + 경영학 + 정보시스템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복합전공이었다. 전공 교수들로부터 색이 다른 커리큘럼 과목을 배울 수 있었다. 돌아보면 IT 기의 인사담당자로서 직원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서포트하는 일과 제법 잘 어울리는 전공이었다. 그러나 회사 입사 동기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S/W 엔지니어 신입사원이 희망 부서 1순위에 '인사팀'을 적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난 내가 꾸는 꿈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 '왜?'라는 이유를 묻게 되고 그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이 나의 적성에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되거나 누구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니?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는 비전(등대)이 있니?' 이런 질문들이 내 인생의 답을 찾게 해 주었다. 정확하게는 답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난 스스로 꿈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오면서 갖게 된 가치관, 멘토, 영웅, 직업처럼 내가 꿈꾸는 인생의 지향점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그냥 주위 사람들이 가니까 나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아서는 내가 사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남을 쫓아 가면 시간이 한참 지나고 어느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이 길이 아니었구나' 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난 나의 꿈을 존중했다. 확신이 없는데 선택해야 할 때 누구나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후회할 까 두려울 것이다. 그때 나의 꿈을 존중하면 내 손으로 직접 결정하는 데 힘이 되었다. 앞으로 계속 닥칠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남 눈치 보고 주저하고 싶지 않다면 선택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꿈을 그리다 보면 결국 그것을 닮아가기 마련이니까.


 "이십 대 경험이 평생의 사이즈를 정한다."


 삼십 대를 지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변화나 도전에 대해 소극적이 되기 쉬워진다. 경험과 지식, 노하우는 더 쌓일지라도 체력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주위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원래 저래'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바꿔 말하면 저렇게 살아왔으니 저렇게 살게 두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렇게'가 중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선택지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이십 대의 태도, 습관, 선택이 남은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느 날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대학 동기들이 모두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서 비슷한 급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거든. 십 년이 지나고 봤더니 잘 나가는 친구와 못 나가는 친구 사이에 격차가 벌어졌더라고. 근데 20년 만에 봤더니 격차가 좁혀지기는 커녕 엄두조차 안 나게 크게 차이 나는 거야."

 왜 격차가 벌어졌을까.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십 대에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위험이 좀 따르더라도 해 본 것과 그렇지 않았던 차이였다.

 삶이란 평생 자아를 찾는 과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되고 싶은 게 누구인지,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한정된 선택지 중에 나를 억지로 껴야만 할 것이다. 잘 맞지 않는 옷 중에 그나마 이게 맞으니까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삼을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선택지를 늘리면 어떨까. 나한테 더 맞는 옷을 찾을 수 있다.

 실패를 겪을 일이 없는 점이 가장 큰 리스크이다. 실패는 Yes 또는 No로 흑백이 나눠지는 게 아니다. 실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Yes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 있다. 실패로 인해 머릿속에 쌓인 지식과 몸에 베인 경험이 다음에 성공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막상 실패를 여러 번 겪다 보면 작은 실패는 그럴 수 있지 정도가 되고 큰 실패는 다시 꿈을 꾸는 계기가 된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았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니 실패하더라도 좋았다. 도전했다. 


 내가 가는 길에 브레이크를 만났더라도 멈춰 서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다시 엑셀레이터를 밟기 마련이다. 내 인생의 가속도가 붙는 순간, 그게 청춘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결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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