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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려 하는가

- 안전과 안정을 위한 나의 대비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가 죽은 후에도 제 이름이 세상에 새겨져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고 싶은 걸까요.

살아있는 동안에는요?

글쎄요. 저는 제 이름과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고 새겨지는 그런 모습을 꿈꾸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요. 제 얼굴과 이름이, 제 가족들이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편에 저는 좀 더 가까운 듯합니다.


저는 '개인정보 노출'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입니다.

'개인정보 제공 동의'는 웬만하면 미동의를 체크하구요. 택배를 받을 때에는 가명을 쓰기도 합니다.

제 생각을 말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혹시 제 발언이나 글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좀 두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의 글이나 생각이 제가 속한 집단의 생각처럼 비추어져 혹시나 저의 조직에 누를 끼칠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가급적이면 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제 생각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이런 생각 때문에 그동안 글을 쓰다 포기하다를 반복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도대체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요. 저를 오롯이 비추지 않으면서도 제가 글로 남겨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면, 저는 어떤 것을 잘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한 번 내 것이 되면, 그건 더 이상 '물건 1', '물건 2'가 아니라,

추억이나 기억, 소중했던 나의 누군가 혹은 나의 역사가 묻어, 의미를 가지게 되니까요.

사진도, 대화기록도, 과거에 썼던 어플도 비워내지 못해서 제 휴대폰은 자주 '저장공간 용량 경고' 알림을 보내고는 합니다.

저의 이러한 행태(?)는 제가 자주 하는 말 '혹시나'로부터 비롯된 건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나 나중에 필요할 지도 몰라서.

글을 쓰고 남기고픈 이면에는, 이런 '혹시나에 대비해 남겨두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네요.

남겨두면 이 글이 나중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요.


특히 사소한 것에 감탄이나 감명을 잘 하는, 어떤 의미를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저는, 그런 감정과 순간들을 잊지 않고 남겨두고 싶어하는 듯합니다. 글을 통해 남겨진 그 순간들이 나중에 제가 앞으로 또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제가 꾹꾹 눌러썼던 글이 미래의 저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경험을요. '혹시나' 미래의 제가 글에 남아있는 과거의 나로부터 응원을 받야아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생각에 글을 쓰고 남겨두고 싶은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글을 쓰는 이유를 저에 초점맞춰 생각해보았는데요. 확실히 글을 씀으로써 '나'가 얻고 싶은 바가 큽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유는 비단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각자 그들만의 힘든 전투를 하고 있다"가 있습니다. 어디서 저 문장을 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회생활 2~3년차 즈음 저 문장을 접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선임들과 어른들에게도 각자의 역사와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을 볼 때에 그 사람이 겪었을 인내의 시간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쁘게 말하기, 상대가 예상치 못한 소소한 감동이나 배려 전하기가 한동안 제가 제일 중시했던 행동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전투를 치르고 있는 상대방에게 기쁨과 감동을 선물하고 싶었달까요.

누군가가 저를 '레이더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타인의 기분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느끼고 쉽게 공감하며 오래 곱씹는 것 같다구요. 그래서 저는 타인의 공간과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전하려는 것에 항상 진심이었던 듯합니다. (가끔은 미운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요)

이러한 성향도 글을 쓰는 이유가 되는 것 같아요. 알고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측은한 면에 공감과 위로를 글을 통해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요.



지금까지 살면서 파악한 나란 사람은,

- '안전'이란 가치를 매우매우 중시하고

- '혹시 모를 미래'를 늘 대비하려 하며

- 남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고

- 항상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문득 깨달은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내가 괜찮은,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글을 통해 나의 생각과 마음을 남기며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하고 말해보고 싶은 마음.

2. 내가 쌓아둔 아웃풋이, 혹시 모를 미래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예를 들어 경제적ㆍ사회적 혹은 정서적 안정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3. 머릿속이 복잡해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많은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게 다소 버거워서,
생각들을 글로 풀어냄으로써 머리와 마음을 비워내고 정돈하고 싶습니다.

4. 충돌하는 생각과 감정들 속에서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5.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싶어서.


궁극적으로는 '안전과 안정을 오래도록 지켜내고 싶어서' 그리고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저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언젠가 쌓아둔 글의 힘이 필요해질 때, 저를 지켜줄 수 있는 필살카드로 꺼내쓰고 싶은 마음.

그리고 저에게 붙은 여러가지 소속과 꼬리표들을 모두 지운 후에도 남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 가능성은 어디까지인지 알아가고 싶은 마음.

크게 이 두가지가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뭔가 모를 불안함이 항상 마음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글을 쓰고 나면, 불안을 잠재운 채로 좀 더 가볍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잠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왜 글을 쓰는가'를 정리해보니,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 마음이 좀 더 공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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