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어느 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들이 다니던 어린이집 원장님께 전화가 왔다. 낮에 아들이 같은반 여자친구 팔을 깨물었는데, 친구 아빠가 그 일로 화가 나서 어린이집 원장님께 거세게 항의를 하였다며, 어린이집에서 경위를 설명하고 사과를 했는데도 아버님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아, 어머님(=나)이 직접 아버님께 사과전화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취지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살면서 규칙을 크게 어기거나 남에게 큰 피해를 끼쳐본 적이 없어서,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해야 하나, 상대방이 더 크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면 어떡하나, 긴장되고 두려워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 친구 팔에 깨문 자국이 얼마나 남았을지, 상처가 큰 것은 아닌지, 흉터가 남을 정도인지 걱정도 되고, 너무 미안하고, 창피하고, 어디 숨고 싶을 정도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친구 아버님과 통화를 했고,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거듭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말하다 보니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바뀌었고, 실제로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친구 아버님은 내게는 화를 내지 않으셨고, 시간이 오래 지나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많이 어린 아이가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이해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고, 혹시 병원 치료가 필요하게 되면 꼭 알려달라는 내게 그럴 정도는 아니라며 금방 전화를 끊으셨다.
2주 전 어느 밤
딸이 영어학원에 갔다가 오른쪽 네번째 손가락이 부러졌다. 다친 이유에 대해 딸은 화장실에서 넘어졌다고만 말했는데, 단순히 넘어진 정도로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 뼈가 골절까지 된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자세히 물어보니, 화장실 가는 복도에서 같은 반 친구가 뛰어가다 밀어서 넘어져 다친 거라고 했다. 그래서 학원에 복도 cctv가 있는지 문의하기 위해 연락을 했고, 아이가 다친 경위를 제대로 모르고 있던 원장님에게 아이로부터 들은 내용을 전달하며, 딸을 밀친 아이 부모님께도 그 내용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드렸다. 당시에는 아이가 손가락 수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는 의사 소견을 받은 직후라 걱정과 화가 차오르고 있어서, 원장님과 통화하는 내 목소리가 좀 격앙되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하필 복도에는 cctv가 없다고 해서, 내심 상대 아이 부모님이 시시비비를 따지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기우였고, 상대 아이 어머님은 늦은 저녁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연신 "정말로 죄송하다"고 했다. 5년 전의 나처럼 당황스러움과 죄책감에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니,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면 이번 일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전달해 달라고 한 것이라고, 괜찮다고, 어머님 말고 아이가 직접 우리 딸에게 사과를 하면 좋겠다고 말하고 빠르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통화 시간은 2분 30초가 채 안되었다.
이 일로, 비로소 5년 전 어느 늦은 밤에 우리 아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잔뜩 화나 있던 친구 아버님이 왜 더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알겠다며 전화를 빠르게 끊었는지 이해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사과를 받으면 마음이 풀어진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어진다.
오늘
20대 청춘 두 명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다.
만약 우리 딸이 어렵게 공부해서 기특하게 시험을 통과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사가 되었는데 학교가 너무나 힘들어 스스로 죽는다면,
만약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상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시키는대로 하다가 물에 휩쓸려 죽는다면,
상상을 해봐도 도저히 현실감이 들지 않는,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고통일 것이다. 손가락 골절, 이빨 자국 정도의 일과 비교해서 서술하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로 온 세상이 뒤집어지는, 가라앉는, 솟구치는 일이리라.
그래도, 안타깝게 떠나간 이들의 부모님이 그 일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로부터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해 고통이 분노로 변하는 일이 2014년과 2022년에 이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