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래간만에 친정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근교로 나가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해 식물원이 있는 인근 대형 카페로 갔다.
( 내 나이에 엄마라고 부르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나는 ‘어머니’라는 단어로 불러본 적 없는 철없는 딸인걸 어떡하겠는가. 그래서 부끄럽지만 ‘엄마’라는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일층에 자리를 잡았지만,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건 주차된 차들밖에 없었다. 동생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3층으로 가자고 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벌떡 일어나 마시던 커피를 든 채 계단을 걸어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엄마가 한참 뒤처진 채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올라오고 계셨다.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 씩 내딛는 모습이 몹시 힘들어 보였던 것이다.
아뿔싸, 계단을 오르는 게 저렇게까지 힘들 것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고작 조금 나은 뷰를 엄마의 불편함보다 우위에 두다니.
순간 동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나이 들어 버린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무심한 딸의 후회가 뒤섞인 감정을.
엄마는 어느 곳에서든 단 한 번도 주눅 든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여장부였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시어머니에게조차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다가도, 소주를 사들고 들어와 시어머니에게 사과하며 술을 건넬 정도로 쿨내 나는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걸음은 어찌나 씩씩하고 빠른지, 엄마를 따라다닐 때면 종종거리며 걸음의 반절은 뛰다시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엄마가 언제 저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어쩌면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을 엄마를, 내가 저렇게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
엄마는 딸의 출산과 남편의 죽음을 연이어 겪었다.
나는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어렵게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임신한 지 여섯 달 즈음부터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아빠는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엄마는 나를 위해 그 사실을 비밀로 하셨고, 나는 쌍둥이를 출산한 이후에야 아빠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갓난아이들을 데리고 아빠를 찾았을 때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진 상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돌아가셨다.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는 사별의 슬픔에 온전히 빠져 지낼 겨를조차 없으셨다.
몸이 약했던 나를 위해, 쌍둥이를 돌봐주기 위해 상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아를 조금만 도와줄 마음으로 올라오셨던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신부전증 진단을 받는 바람에 꼼짝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아픈 딸을 돕기 위한 힘든 육아의 길로 접어드신 것이다. 그때 엄마의 또래들은 이제야 편안히 여행도 다니며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테지만, 엄마는 자식을 위한 치열한 삶을 다시 시작하셨다.
딸의 곁에 있는 동안 엄마에게 힘들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겠지만, 정성을 쏟지 않은 날 또한 단 하루도 없었다.
내가 복막투석을 할 때, 한 달에 한 번씩 투석액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한 달 치 투석액 박스는 거실 베란다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는데, 배달은 늘 같은 사람이 왔다.
엄마는 그 사람이 올 때마다 이 만원씩 쥐어주며 감사하다고, 뭐라도 사 드시라며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기도 했지만, 제 딸이 이렇게라도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분 아니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하셨다.
고작 투석액 박스를 배달해 주시는 분께조차 감사하셨으니, 다른 것들은 오죽했겠는가?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사하다는 말을 하셨다. 제 딸이 이렇게라도 견딜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들을 향해서 말이다.
게다가 엄마는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이나 발밑을 구르는 돌멩이에게조차 딸의 건강을 빌었고, 제 작은 행동이 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까닭에 악한 마음 한 번 먹지 않으려 애를 쓰셨다. 부끄럽게도 그 당시의 제 딸은 제 삶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불만과 억울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쌓은 수많은 음덕을 받은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o형(o형 혈액형은 인구가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식 대기가 길다) 혈액형을 가진 내가 3년 만에 뇌사자 이식을 받은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 나는 긴 투병생활에서 벗어나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다
텔레비전 속 해외의 멋진 풍경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엄마에게, 나중에 함께 꼭 가자고 기약 없이 해놓은 수많은 약속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사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조차 버거워질 만큼 노쇠해 버린 것이다.
아빠의 투병 사실도 모른 채 제 뱃속 아이들만 생각하다가, 내 손으로 준비한 음식 한 번 대접해보지 못하고서 아빠와 이별했는데, 이제 엄마에게조차 후회와 미련만 남기고 마는 건 아닐까.
오늘은 나의 이 마음과 꼭 들어맞는 ‘풍수지탄’이라는 사자성어를 소개할까 한다.
풍수지탄은 <한시외전>에 나오는 한 구절에서 따온 사자성어이다. 유래는 이렇다.
공자가 제 뜻을 펼치기 위해 천하를 떠돌던 중이었다. 어떤 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유를 물었다.
“저는 고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제게는 세 가지 한이 있습니다. 첫째는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것이며, 둘째는 저의 뜻을 받아줄 군주를 어디서도 만나지 못한 것이며,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군요.”
고어의 대답을 들은 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들에게 고어의 이야기를 기억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 비롯된 ‘풍수지탄’은 ‘바람 부는 나무의 탄식’이라고 해석되며,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를 여읜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던, 또는 하지 않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어쩌면 나도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부모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지금의 나는 또 그렇게 후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 말이다.
물론 지극히 교과서적인 다짐이겠지만, 엄마를 위해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지금 하고 있는 후회에 더 큰 후회마저 차곡차곡 쌓고 싶진 않으니까.
風樹之嘆(바람 풍, 나무 수, 어조사 지, 탄식할 탄) : 바람 부는 나무의 탄식,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부모를 여읜 자식의 슬픔